PRESS 2012-06 인터내셔널 피아노 콘서트 리뷰 (글- 이혜진)
2012-06-05 14: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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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 인터내셔널 피아노

콘서트 리뷰

 

피아니스트 허원숙의 피아노 이야기 ‘걸러내다’

4월 29일 예술의전당 리사이틀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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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허원숙의 음악은 문학적 아름다움을 수반한다. 음악을 이해하는 것은 언어를 이해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밝히는 허원숙의 음악 철학은 청중으로 하여금 삶에 대해 사랑에 대해 사색하도록 유도한다. 단어 하나 하나 여운을 담아 시를 낭송하듯 숨조차 음악인 것을 우리는 이날 연주를 통해 마음에 새겨 본다.테크닉과 표현의 감상을 넘어 삶을 두르고 있는 것들, 깊이 헤아리려하나 지나치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들에 대해 돌아보는 시간이었던 ‘걸러내다’.

 허원숙은 슈베르트 <소나타, D.894>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슈베르트의 피아노 작품들, 특히나 그의 소나타들 중 후반부 작품들은 연주자들이 어떠한 위험요소들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부분,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오는 내면적 노래를 표현해야 하는 것 등)을 껴안아야하는 조금은 두려운 존재이기도 하다.

허원숙은 악장별로 피아노와 함께 한 세월을, 이야기를, 공간의 잔향감을 최대한 누릴 수 있는 터치로 서사적으로 풀어갔다. 피아노와의 애증의 관계, 사랑하기에 기대하고 다투며 화해하기를 반복했던 무수한 세월들.... 마지막 4악장 allegretto는 그 모든 것을 걸러내고 숙명처럼 받아들이며 서로를 보듬어 안고 피아니스트로의 삶을 살아가겠다는 고통 뒤의 온전한 기쁨이 투영되어 있었다.

이건용의 <여름빛에 관한 3개의 악상>은 이 날 연주를 위해 위촉되었다. 작곡자와 연주가가 서로를 알아온 세월만큼이나 작품과 연주는 생생함에 있어 듣는 이로 하여금 온몸을 에워싸는 듯한 안착감을 주었다. 이 작품이 훗날 미적 지위를 인정받아 고전이 된다면, 이날 공연은 살아있는 역사의 한 장면으로 남을 것이고, 청중은 함께 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대단한 영광이리라. 여름의 강렬함 물, 빛, 바람 그 모든 것의 광활한 흐름은 허원숙의 빛깔 맑은 이상적 소리로 창조되었다. 보들레르 시에서 차용한 여름빛이란 아이디어는 작곡가 이건용의 지적 카리스마를 내포한다. 작곡가 이건용의 문체에서 만날 수 있는 부드러움과 친절함 안에 있는 지식의 향연은 그의 음악어법으로 구현되어 세 개의 악상으로 세상과 만났다.

마지막 이야기는 브람스 <피아노 소곡, op.118> <op.119>로 순도 높은 사랑을 내포했다. 이상적인 사랑을 추구했던 한 인간의 고독은 그의 작법 곳곳에서 찾을 수 있는 은밀함에서 느껴진다. 브람스는 사랑의 여러 빛깔 중 배려와 절제를 선택했다. 그러한 브람스의 삶은 그의 피아노 소품에 농축되어있다. 브람스의 의도는 허원숙의 사고의 깊이와 연주력이 합일점을 만나 그 빛을 드러내었다. 이것은 고도로 숙련된 내공과 함께 음악을 관조적으로 바라보는 통찰력을 필요로 한다. 한 편의 모노드라마와도 같았던 허원숙의 연주. 내면의 잠자던 심상을 자극적이지 않게 터치하면서 깊이있게 들여다 볼 수 있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이날의 연주는 미적인 의미부여를 굳이 하지 않더라도 음악 안에 스며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이 자꾸만 새어져 나오는 그러한 연주였다. 연주가의 상상력과 함께.

‘걸러내다’ 이 네 음절의 단어를 이날 음악과 함께 한 이들은 저마다의 심상 속에 어떠한 의미를 품고 연주홀을 떠났을까?

 

글_ 이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