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FORMANCES 1999-11-26 제22회 독주회 <...당신이 그립습니다.>
2007-11-27 11:24:53
허원숙 조회수 2741

허원숙의 피아노 이야기


"...당신이 그립습니다."

 

1999-11-26 영산아트홀

 

<프로그램>

브람스 4개의 발라드, 작품10
오이돈 피아노를 위한 에세이(1999, 초연)
스크리아빈 소나타 제1번, 작품 6
리스트 바흐의 모티브에 의한 변주곡<울며, 애통하며, 고뇌하며, 두려워하며>

 

<연주에 앞서>

 

오늘 연주회에서 저는 여러분께
조금은 특별한 만남을 주선해 드리려고 합니다.
그분들을 제가 아냐고요?
저는 전혀 모르는 분들입니다.
오로지 여러분만이 그분들을 알고 계십니다.
한 때는 여러분의 소중한 살과 같이,
또, 여러분의 호흡처럼
가까이 느꼈던 분들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여러분 곁에 계시지만
너무도 익숙해져서, 그분들의 소중함이 잊혀진 분들입니다.
아니면 이제는 이 세상을 떠나
먼 곳에 가 계신 분들일 수도 있겠지요.

 

수잔나 타마로는 그의 소설
<가라, 네 마음이 너를 이끄는 곳으로>에서,
'죽은 사람을 우리가 아쉬워하는 이유는
그가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기보다
그와 함께 못다한 말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랑하는 어머니를 여의고
'우리가 그를 잃은 것을 슬퍼하지 말고,
우리에게 그가 계셨다는 것을 감사하자'고 했습니다.

 

오늘 연주되는 작품들을 통하여
여러분을 키우시느라
정작 당신은 쪼그라드신 부모님을 되새기고 (브람스:발라드)
돌아오지 않는 길을 가신 분의 그리움을 달래며 (오이돈:에세이)
끝없는 슬픔과 절망을(스크리아빈:소나타 제1번)
종교적인 구원으로 승화하는 (리스트:변주곡)
한 편의 소중한 이야기를 가져가십시오.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서 만나신 그 분을 나중에라도 뵈면
두 손을 꼬옥 잡아드리십시요.
혹시 그 분이 이 세상에 계신 분이 아니라면
작은 목소리로 나즈막하게 불러보십시오.
"당신이 그립습니다."

 

.............................................................<이야기 1. 브람스:4개의 발라드>

 

"너의 칼은 왜 그렇게 붉게 피로 물들어있느냐?
에드워드, 에드워드!
너의 칼은 왜 그렇게 붉게 피로 물들고,
너는 왜 그렇게 슬프게 돌아오느냐?

 

아, 저는 저의 독수리를 죽였습니다.
어머니, 어머니!
아, 저는 저의 독수리를 죽여버려
이제 더 이상 그 독수리는 없습니다.

 

너의 독수리는 피가 그렇게 붉지 않은데,
아들아, 나에게 사실대로 고백하렴.

 

오오, 저는 저의 붉은 말을 죽였습니다.
그 말은 거만했거든요..."

 

어머니의 의심에 찬 질문과 아들의 빙빙 돌리는 거짓말로 시작하는 이 시는 브람스가 평생토록
가장 아꼈던 헤르더의 <민족의 목소리>라는 시집 중에서 발췌한 스코트랜드의 발라드 "에드워드"입니다.
이 시에서 어머니는 불안한 의심을 떨쳐버릴 수 없어 아들에게 자꾸 추궁합니다.
결국 아들은 어머니의 다그치는 물음에 그의 아버지를 살해했다고 고백하고 자신이 저지른 죄가 무서워
멀리 탈출하려고 합니다.
브람스는 헤르더의 시 "에드워드"에 소리를 입혀 작품 10의 첫번 째 곡으로 삼았습니다.

 

아버지를 살해한 아들의 비극...

 

화초를 키우다보면 그 푸르고 싱싱하던 잎들이,
꽃 한 송이를 피워내느라 양분을 다 빼앗겨 누렇게 떠 버리고 힘 없이 말라버리는 것을
종종 보곤 합니다.
자식을 키운다는 사실이 그런 거 아닐까요?
"너나 먹어, 난 배 안고프단다"라고 하시는 부모님의 말씀을 듣고 우리 철없는 자식들은,
부모님은 항상 배부르신 사람들로 알았더랬죠.
그리고 서서히 시들고 말라가는 부모님을 알아차리기보다는
점점 크게 자라나는 나를 대견해하면서 마치 부모님을 위해 내가 자라나주는 것처럼
착각했더랬죠.
에드워드처럼 칼을 피로 물들이는 끔찍한 일을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어느덧 하얗게 서리내린 부모님의 머리와,
주름이 깊게 파이신 이마와
굽으신 허리를 툭툭 치시는 힘없는 손목을 보고 있노라면
죄송함으로 마음이 떨립니다.

 

..........................................<작곡자가 꾸미는 이야기 2. 오이돈:피아노를 위한 에세이>

 

오직 "선생님"의 모습이 우러러보여서 교직에 발을 들여놓으셨다던 아버지.
아버지에게는 또 하나, "문학"-좀 더 정확히 "소설가"이고 싶은 열정도 있으셨답니다.
그러나, 교감이 되고, 교장이 되면서 그것은 아쉬움으로 숨기실 수 밖에 없으셨다지요.
그래도 아쉬워 아버지는 수필, 소설, 교육논문 등 여러 글을 쓰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글들을 모아 "오일환 교육/문학집:마음의 울타리"로 묶어 정년퇴임하시는 아버지께 선물했습니다. 그 책 속의, 아버지가 남기신 에세이 중 5편을 음악으로 엮어봅니다.

 

1.반응계산

 

["저어, 차자앙, 셈이 틀렸어. 십원이 남는걸"
"뭐라구요? "하는 차장의 쏘아보는 눈초리에 부딪쳤다.
.....남의 허물이 되는 것을 일러주기란 여간 조심이 가는 일이 아니다.
그것이 아무리 속마음에서의 살뜰한 충고라 할 지라도 받아들이는 사람 몇몇이나 순수하게 다른 감정의 반응을 일으키지 않고 고맙다고만 할까?]

 

...........더 온 거스름돈을 되돌려 주려 했던 아버지가 남들 앞에서 자신의 허물이 드러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똑똑하고 열심인 차장의 앙칼진 말씨와 태도에 눌려 횡재를 강요당한 후 차장의 행동을 생각하며 쓰신 글입니다.

 

2.냉면예찬

 

[냉면을 먹노라면 으례 냉면에 따른 이런 저런 이야기로 화제가 곁들여 더 구미를 돋구는 법이다.
또 식성에 따라 "얘, 겨자 다오"부터, "외상 달아다오"까지 달라는 것이 모두 열 두 가진 된다는 우스운 이야기도 있다.]

 

3. 그 때 못 한 고별사

 

[............]

 

.........아버지가 쓰신 글에서 빌려온 제목으로 드리는 저의 고별사입니다.

 

4.잔인한 의식

 

[목이 졸리던 그 때 주인공은 꽃밭이었다. 꽃 속에 앉아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결국 상여에 꽃을 새긴 이유와 같았다...... 주인공은 도수장으로 팔려가는 소처럼 그저 떠들썩한 사람들 속에서 좋은 것으로만 아는 어린애 같았다. 이 의식이 끝나기만 하면..... 장내를 뒤흔들었던 박수소리가 공허하게 다시 들려지고 있었다.]

 

..............영원히 빛날 교육자라고 칭송이 자자했던 성대한 정년 퇴임식이 있은 지 채 1년이 지나지 않아 둘레가 해진 봉투에서 광고지를 꺼내들고 어줍잖은 판촉을 벌이려 방문한 평소 존경하던 교장선생님의 퇴임 후 모습을 접하고 그 화려하던 퇴임식은 잔인한 의식이었다며 슬퍼하신 글입니다.

 

5."........... 우리의 혼을 거기 불러 줄 것입니다."
[나이를 먹어가며 어쩐지 자꾸만 우리 생전에 고향에 들어가 보긴 틀렸다는 생각이 듭니다. 후손들이 커서 내 고향 산천을 찾아 내 집 뜰에 가 서서... 우리의 혼을 거기 불러 줄 것입니다..... 그리하여 끊겼던 우리의 고향의 삶을 이어 줄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프게 떠나오신 고향 이야기를 자꾸만 들려 주시곤 하셨습니다.

 


.................................................................................<이야기 3. 스크리아빈:소나타 제1번>

 

"내 나이 스무살. 내 생애의 가장 처절한 사건. 내 손에 문제가 생기다.
영광이며 명예로 생각해 왔던 나의 최고의 목표에 장애가 발생했다.
처음으로 맞는 내 인생의 진짜 패배. 나는 기도했고, 교회에도 갔다.
하나님꼐 울부짖었고 내 운명에 외쳤다.
나의 첫 번 째 소나타를 장송곡으로 작곡했다."

 

스크리아빈이 그의 일기장에 기록한 것처럼 1892년은 그에게 지옥과도 같은 해였습니다.
졸업시험에서 피아노 부문에서는 라흐마니노프에게 황금대상 메달을 빼앗기고
자신은 작은 금메달에 만족해야 했고,
작곡 부분에서는 심사위원인 아렌스키의 반대로 졸업장도 없이 학교를 떠나야 했으며,
게다가 당대 비르투오조였던 요셉 레빈과의 경쟁을 의식하여
피아노를 맹렬히 연습한 결과 오른 손에 부상을 얻어,
피아니스트로서의 성공마저 불투명해졌기 때문입니다.

 

스크리아빈 자신의 스무해 삶의 초상과도 같은 이 소나타는 1892년에 작곡되어
이듬해 출판되었습니다.
전체가 4개의 악장으로 구성된, 발라드적인 성격이 강한 곡들로 네개 악장 모두
하나의 테마 (상승하는 F단조 음계)로 엮어져 있습니다.

 

제1악장에서는 운명에 대항하며, 신에게 대항하는 스크리아빈의 외침이
끊임없이 분출하는 에너지로 표현되어 있고,
제2악장에서는 자신만의 고백이 담긴 기도가,
흐느끼며 하강하는 반음계에 담겨 있습니다.
악마적인 죽음의 무도를 연상케 하는 제3악장은
완성되지 못한 채 작은 레시타티보를 통해
제4악장인 장송행진곡으로 빨려들어갑니다.
운명과 신을 원망해 보며 결국 자기 자신을 절망에 묻어버리고야 마는 스크리아빈은
장송행진곡 중간 부분의 천사의 합창을 의지하고 통한의 심정을 나타내보지만
스무살의 청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큰 슬픔과 절망에
다시 처절한 비탄에 잠진 장송행진곡에 몸을 싣고 끝을 맺습니다.

 

........................................................................<이야기 4. 리스트:바흐 모티브에 의한 변주곡>

 

자신의 사랑하는 딸 블란디네의 죽음이 가져온 충격은
리스트로 하여금 새로운 작품을 쓰도록 하였습니다.
이 곡의 주제는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칸타타 제12번에서 따온 것으로,
바흐 역시 그의 불멸의 대작인 b단조 미사의 Crucifixus(십자가에 달리신)에서도
이 선율을 사용하여 작품을 완성하였습니다.
리스트는 1860년 바이마르에서 이 변주곡의 전신인 프렐류드를 작곡하였고, 2년 뒤인 1862년에는 비로소 동일한 주제를 가지고 오르간 연주용으로
<울며, 애통하며, 고뇌하며, 두려워하며>에 의한 변주곡을 작곡하였습니다.

 

상당히 긴 제목인 <울며, 애통하며, 고뇌하며, 두려워하며... 이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인들의 눈물의 양식입니다.>에서 리스트는
흐느낌으로 상징되는 하강하는 베이스의 선율을 끊임없이 변주하며
삶의 고통과 슬픔을 깊은 상처로 표현하지만. 곡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다시 바흐의 코랄을 인용하여
딸의 죽음이 가져다 준 슬픔과 절망을 딛고 일어서며
나아가 딸의 부활과 영생을 기원하는
아버지의 깊은 사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강하는 반음진행으로 표현되었던 흐느낌이
마지막 부분에서는 상승하는 음계로 부활의 상징과 함꼐
천사의 힘찬 나팔소리로 끝을 맺습니다.
악보에 씌여진 코랄의 가사 내용은 연주자만 볼 수 있지만
여러분들도 읽으실 수 있도록 적어드립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선하시니, 나 항상 그의 곁에 머무리로다.
내가 거친 글로 내어 몰리더라도, 죽음과 불행이 나를 휘감아도,
나의 아버지 하나님은 나를 그의 팔로 감싸주시리로다."

 

글 기획: 허원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