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S \"여기가 아닌가봐\"... 프레데릭 쇼팽 5 방송원고:당신의밤과음악 06-05-13
2007-11-27 18:58:39
허원숙 조회수 3222

KBS FM 당신의 밤과 음악

허원숙의 <생활을 노래함>코너

2006년 05월 13일 원고.... 프레데릭 쇼팽 (5) “여기가 아닌가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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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 20살의 쇼팽이 바르샤바를 떠나 세계 무대를 향해 첫 발을 내딛던 순간의 이야기를 해 드렸죠.

엘스너 선생님이 쇼팽이 마차를 타고 가던 길목에 음악원 학생들과 함께 서 기다리다가 자신이 쇼팽을 위해 작곡한 이별의 노래를 연주하던 장면과 함께....

보다 넓은 음악세계로 향한 쇼팽의 발길은 어디로 갔을까요...

당연히 음악의 메카, 오스트리아의 빈이겠죠.

 


바르샤바를 떠나 드레스덴, 프라하를 거쳐서 빈에 도착한 쇼팽의 눈에 비친 빈의 모습은 그렇게 호의적이거나 정감있는 모습이 아니었어요.

우선 물가가 지난 번에 왔을 때보다 많이 높아졌구요,

전보다 더 많이 요한 쉬트라우스나 요셉 란너의 빈 왈츠가 유행하고 있었구요,

음악의 예술적 질은 떨어져있었어요.

친구들을 찾아봤지만, 다른 나라로 갔거나, 아파 누웠거나 해서 만날 수 없는 상황이었구요,

지난번에 빈에 왔을 때, 쇼팽의 작품을 출판해 주겠다던 하슬링거라는 출판업자는,

악보출판은 하지도 않고, 장삿속으로만 어떻게든 인세를 저자에게 안 주고 은근슬쩍 넘어가보려는 속셈이었지요.

연주는 해야겠고,

가져온 돈은 없고,

집에서 송금수표를 부쳐왔는데,

현금으로 바꿔야 사용할 수 있잖아요,

그래서 유태인 은행가의 집을 방문했는데,

송금수표를 바꾸려 한다고 하면서,

저는 쇼팽이라는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이고

지난 번 빈에서 성공을 거둔 사람이라고 소개하니까,

그 은행가는 “이렇게 고명한 예술가와 만나서 영광입니다.”고 대 환영을 하더래요.

그런데 쇼팽이,

“저, 제가 이제 여기서 연주회를 개최해야 할 텐데

많은 돈이 드는 관계로 혹시 저에게 대출을 해 주실 수 없는지?”라고 말하니까,

그 은행가 한다는 말이

“이 도시에는 고명한 피아니스트들이 구름처럼 몰려있기 때문에

대단한 명성이 없는 한, 연주회의 성공은 어렵습니다.”라며 완곡히 거절을 했대요.

 


고명한 피아니스트라면서....ㅠ.ㅠ.

 


하지만, 빈에서 이렇게 좋지 않은 인연만 생긴 것은 아니고요, 베토벤의 주치의였던 의사의 도움도 받고 또 베토벤의 제자이면서 작곡가인 체르니도 만나서 교분을 쌓았죠.

그런데 빈에서의 생활을 시작한 지 1주일 만에 바르샤바에 혁명이 시작되었구요,

함께 온 티투스라는 친구는 넘치는 혈기와 애국심으로 폴란드로 돌아가서

군에 입대해 버렸구요,

쇼팽도 함께 가려고 했지만,

군인이 되기에는 너무 몸이 허약하니, 조국에 봉사하는 일은 군인이 되는 방법도 있지만, 예술가로서도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아버지의 설득에 못 이겨 빈에 홀로 남게 되었지요.

 


음악 들을까요?

쇼팽의 마주르카 중에서 네 곡을 준비했습니다. 작품 24-4, 63-3, 33-3, 33-4.

연주에는 러시아의 피아니스트죠, 레오니드 쿠즈민(Leonid Kuzmin)의 연주로 감상하시겠습니다.

(시간 3:58+1:42+1:24+4:45=약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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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빈이라는 도시는요,

과거에 모차르트, 슈베르트, 베토벤이 살아서 활동하던 시기에는

위대한 음악의 도시라는 명성을 얻었었는데요,

1830년이 되니까,

모차르트 이미 한참 전에 죽었죠,

베토벤 1827년에 죽었죠,

슈베르트도 1828년에 죽었죠..

이제는 요한 쉬트라우스나 란너가 너무 유행하면서,

예전에 천재들이 차지했던 위치를

이젠 평범한 그저 그런 음악가들이 활개를 치는 시대가 되었어요.

유행도 유행이라지만,

그래도 너무 심하다 싶을 정도로 빈 왈츠가 유행하면서

향락적인 분위기가 무르익게 되었는데,

그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당시 빈의 시민 계급이 정치적인 관심을 갖지 못하도록 하려는

메테르니히의 문화정책에 의한 결과였다고 해요.

요즘에도 그런 일들 많잖아요, 왜.

정치에 관심을 못 가지게 하려고 스포츠를 육성하는 정책을 만들고 그러는 일처럼요.

아무튼, 란너, 쉬트라우스 같은 왈츠 음악가,

그리고 왈츠에 탐닉하는 빈 사람들,

왈츠가 아니면 음악이 아닌 것처럼 되어버린 빈의 풍토가 쇼팽을 불편하게 했구요,

그것은 쇼팽이 스승 엘스너에게 썼던 편지에서도 확실히 알 수 있죠.

“여기서는 왈츠가 예술 작품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이 곳에선 왈츠 이외의 것은 거의 출판하지 않습니다.”

 


쇼팽이 빈에 계속 정착하지 못했던 이유 중에 또 하나는 바로 정치적 상황이었는데요.

바르샤바에 혁명이 일어나면서 오스트리아도 정치적인 성향이 폴란드에 반대편에 서게 되었어요. 그렇게 되니까 빈에서 살고 있는 폴란드 피아니스트의 처지가 아주 난처하게 된 거죠. 빈에서 연주회를 열어야 되는데, 은행가는 돈을 꾸어주려고 하지 않지, 엘스너 선생님은 쇼팽에게 기대하고 있는 점이 많은데, 좋은 소식은 못 들려드리지... 걱정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어요.

그러면서 한 가지 희망은 혹시 자기가 파리에 가면 폴란드인에 대한 감정이 악화되어있는 빈보다는 폴란드의 자유를 위한 투쟁을 지지하는 프랑스 파리가 훨씬 유리하지 않겠나 하는 것이었죠.

 


불과 한 두 해 전에 성공적인 연주회를 마치고 돌아갔던 빈이라는 도시에서 이렇게 음악적으로 냉대받고, 또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린 쇼팽은 빈에 8개월 정도 머무르면서 그럴싸한 음악활동은 하지 못했고, 작품도 아주 조금밖에 남기지 못했어요.

그러던 와중에, 작곡한 곡이 있는데요.

바르샤바를 떠나온 데에 대한 후회와,

자기가 빈에서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공포와,

친구들 곁에 있지 못하고 조국을 구하는 전투에 참가하지 않은 수치심에서

고통스러워하면서 쓴 작품입니다.

중간부분에는 크리스마스 캐롤이 나오고요.

뭘까요~!

바로 스케르초 제1번 작품 20번입니다.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의 연주로 감상하시겠습니다.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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