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S \"4번의 은퇴,23년의 침묵\"...블라디미르 호로비츠 1 방송원고:당신의밤과음악 06-11-11
2007-11-28 10:14:25
허원숙 조회수 3011

KBS FM 당신의 밤과 음악

허원숙의 <생활을 노래함>코너

2006년 11월 11일 원고....블라디미르 호로비츠  (1) “ 4번의 은퇴, 23년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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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소개하는 피아니스트는요,

연주보다 은퇴하기를 밥 먹듯 하던 연주자인데요, 32-35세까지 3년간의 침묵, 49세부터 61세까지 12년간의 침묵, 64세부터 69세까지 또 5년간의 침묵, 그리고 79세부터 81세에 다시 또 한번 3년간의 은퇴... 그리고 83세까지 연주회를 하다가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뜬 피아니스트이구요, 연주회는 꼭 일요일 오후 4시에만 열었던 피아니스트입니다.

누군지 아시겠죠?

바로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입니다.

호로비츠가 연주회를 일요일 오후 4시로 고집했던 것은 청중을 위한 배려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평일 밤에 연주회를 할 경우 사람들이 직장에서 허겁지겁 저녁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피곤한 상태로 음악회에 와야 하는 것이 너무 안쓰러워서, 자기가 일요일, 그것도 오후 4시에 연주회를 한다면 청중들이 여유있게 음악회에 와서 연주듣고 기분좋게 저녁식사도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죠.

이렇게 청중을 배려해주는 착한 마음씨를 소유한 이 피아니스트는 얼마나 마음이 따뜻한 사람일까....

그런데 사실 <호로비츠는 슈나벨처럼 지적인 사람도 아니었고, 루빈슈타인처럼 원만한 사람도 아니었고, 이기적이고 요구사항이 많은 어린 아이같은 사람이었다>고 타임즈의 음악평론가 마이클 월시가 쓴  호로비츠의 추모기사에도 나와 있는 것처럼, 까다롭기가 이루 말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고 하죠.

연주회는 항상 자신이 쓰던 스타인웨이 피아노만 친다는 조건으로 연주회를 열었고요, 그러니 당연히 보잉 747 비행기로 피아노를 날라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고요, 전속 요리사가 항상 연주회를 따라다니면서 음식을 제공했고요, 정수기도 항상 챙겨가지고 다녔다고 하는데요,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이것들은 사실 그렇게 까다로운 성격이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아요.

내가 쓰는 피아노가 이 세상에서 내게 제일 잘 맞는다고 한다면 내 피아노를 들고 다니면서 연주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또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인데 음식점 음식이 안 맞고 우리집 요리사가 내 식성을 제일 잘 알고 음식을 잘한다면,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또 어디 있겠어요.

그리고 여러 곳을 돌아다닐 때 가장 힘든 것이 물 바뀌어서 배탈나는 일인데, 자신의 몸에 맞는 물을 들고 다니고 싶지 않은 사람이 또 어디 있겠어요.

하지만 그런 일들이 현실적으로 비용의 문제 때문에 불가능한 것일 뿐인데, 만일 그 비용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그 연주에 생명을 건 사람이라면 왜 그렇게 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그런지 호로비츠 자신은 사람들이 자기를 신경과민이라고 보는 것을 민감하게 반응하고, 한 말이 있는데요,

“나는 피아노 연주는 쉽다. 하지만 진짜 나를 미치게 하는 일은 연주회 외의 일들이다. 나는 매일 연주는 할 수 있지만 매일 음식 때문에 식당 찾아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수는 없다. 게다가 나는 고기를 먹지 않는다. 그것은 내 개인적인 신념의 문제이고 그렇기 때문에 전속 요리사가 필요할 뿐이다.”

그러니 좋은 연주를 하기 위해서 이렇게 악기며 음식이며 물 같은 것들도 세심하게 신경 쓰는 호로비츠가, 일요일 오후 4시라는 편한 시간에 음악을 제공하고 싶은, 사려 깊은 생각이 왜 들지 않았겠어요! ^^

 


음악 듣겠습니다. 호로비츠의 연주로 들으실 곡은요....

Liszt의 순례의 해 모음곡 스위스편 중에서 <샘가에서> 와 이탈리아편 중에서 <페트라르카의 소네토 104번>입니다. (연주시간 3:26 + 6:27 = 약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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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호로비츠는 1904년 10월 1일 우크라이나의 키에프에서 태어나서 6살 때 러시아 음악원에서 펠릭스 블루멘펠트 교수를 사사했는데요, 한동안 호로비츠는 작곡가가 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이 혁명으로 가족들의 재산이 몰수당하자 할 수 없이 피아니스트의 길을 선택했다고 하죠. 1922년에 하르코프에서 성공적인 데뷔를 했고요, 1924년 경에는 레닌그라드에서만 25회의 음악회를 가질 정도로 자리를 잡았는데 역시나, 프로그램이 하나도 중복이 되지 않았다고 하네요.

1925년에 베를린으로 옮겼는데, 거기에서 갑자기 병이 난 피아니스트 Hambourg 라는 사람을 대신해서 연주회 직전에 기용이 되어서 차이코프스키 협주곡을 연주하면서 명성을 얻게 되었는데요, 그 때  Eugen Pabst 라는 지휘자는 호로비츠의 연주가 너무 놀라워서 호로비츠의 손을 보려고 지휘대에서 내려왔고 청중들이 흥분하는 것은 말할 수도 없었다고 해요.

1928년에는 토마스 비첨 경이 지휘하는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차이코프스키 협주곡으로 미국에서 데뷔를 했는데요, 그 때 호로비츠만 뉴욕 데뷔하는 무대가 아니라 토마스 비첨도 미국 데뷔 무대였었대요. 그러니 지휘자 입장에서 자신이 더 뜨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겠죠. 호로비츠가 어떤 속도로 곡을 엮어나가고 싶은지 관심도 없고 자신만 잘 하려고 하는 마음이 간절해서 리허설 때에도 협주곡은 건성으로 훑고 템포도 호로비츠가 원하는 템포보다 훨씬 느린 속도로 연주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는데요.

정작 연주회가 시작되었고 호로비츠는 비첨이 요구하는 템포로 착하게 연주를 시작했는데, 연주하면서 청중들의 반응이 별로 흥미로워하는 것 같지 않은 것을 느낀 호로비츠는 3악장에서 폭발하는 듯한 빠른 템포로 곡을 이끌어나가기 시작했고, 그 템포에 놀란 비첨과 오케스트라는 죽을 힘을 다해 따라오느라고 애를 썼다는데, 마지막에 겨우 같이 끝맺음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해요. 다음 날 호로비츠는 “회오리 그 자체, 러시아 남부 초원지대에서 온 고삐풀린 코자크인”이라는 말과 함께 대대적인 호평을 받으면서 화려한 연주가의 생애를 시작하게 되었죠.

 


음악 듣겠습니다.

1928년 호로비츠가 24살 때 녹음한 Chopin의 Mazurka C 샤프 단조 op.30-4와

1930년에 녹음한 Busoni가 편곡한 Liszt의 파가니니 연습곡 2번입니다. (연주시간 3:36 + 3:10 = 약 7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