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S \"장갑끼고, 군복입고.\"...블라디미르 소프로니츠키 2 방송원고:당신의밤과음악 07-07-14
2007-11-28 12:54:31
허원숙 조회수 3099

KBS FM 당신의 밤과 음악

허원숙의 <피아니스트 플러스>코너

2007년 07월 14일 원고....블라디미르 소프로니츠키 (2)  “ 장갑끼고, 군복입고..”

1901.5.8 (러시아 구력 4.25)-196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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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파리에서 돌아온 소프로니츠키는 본격적으로 연주활동을 시작했는데요, 그 레퍼토리가 바로크 작곡가 북스데후데에서부터 시작해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낭만 작곡가 전부, 프랑스의 풀랭크 그리고 스크리아빈, 쇼스타코비치와 프로코피예프의 곡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시대의 작품을 총망라한 것이었죠. 이런 프로그램을 두고 백과사전적인 연주회 프로그램이라고 말하는데, 당시 이런 레퍼토리를 가진 연주자는 안톤 루빈슈타인이 유일했다고 합니다.

소프로니츠키는 1939년에 상트 페쩨르부르그 음악원에 자리를 잡고, 교육과 연주활동을 병행했는데요, 2차 대전이 일어나면서 1941년에 레닌그라드가 독일군에 포위되면서 상황이 힘들게 되면서 연주활동도 많이 위축이 되어버렸어요.

1941년 12월 12일에 있었던 연주회를 회상하던 소프로니츠키의 말을 들어보면, 연주회가 있었던 푸쉬킨극장의 연주회장은 실내 온도가 영하 3도였다고 해요. 청중들은 두꺼운 털코트를 입고도 떨면서 연주회장에 앉아있었는데, 소프로니츠키는 피아노를 쳐야하는데 손가락이 얼어붙어서, 손가락 끝을 잘라낸 장갑을 끼고서 연주를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해요. 하지만 놀랍게도 그 연주회는 정말 황홀했고 또 훌륭한 연주회가 되었다고 합니다.

전쟁의 나쁜 상황에서 레닌그라드에서는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했고요, 소프로니츠키는 몸이 극도로 약해져서 요양차 모스크바로 거처를 옮겼는데, 1943년부터는 모스크바 음악원에 교수로 임명되어서 음악활동을 계속할 수 있게 되지요.

하지만 아무리 활동을 할 수 있다고 해도, 당시의 러시아는 정말 참담하기 이를 데가 없었지요, 쇼스타코비치의 증언이라는 책을 보면, 예술가라는 사람들은 정치가들이 자기들의 필요에 의해서 평생을 이용당하는 사람들이라고 쓰여있고요, 또 자신이 마음 속에 감춰둔 속내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는지가 잘 나와있는데, 사실 그 책도 쇼스타코비치가 자신의 사후에 출판하기를 원해서 책의 원고를 스위스 은행 금고에 몰래 감춰두었다가 출판했다는 것을 보면, 얼마나 당시 상황이 힘들었는지 알 수 있죠. 소프로니츠키도 바로 이 시대의 사람이었는데요.

1945년 스탈린은 소프로니츠키에게 명령을 합니다. 포츠담 회의에 참석해서  연주를 하고 오라는 것이었죠. 거역할 수 없는 스탈린의 명령을 받은 소프로니츠키는 군복을 입고 포츠담에 가야만 했구요, 당연히 군인 복장으로 연주를 해야만 했지요. 그리고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와서는 그 일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해요.

 


음악 듣겠습니다.

스크리아빈의 소나타 제4번 작품 40을 블라디미르 소프로니츠키의 연주로 보내드립니다. 1952년도 실황음반입니다. (2:37+4:42=7분 19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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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 파인베르그, 마리아 유디나와 더불어 스탈린 시대의 러시아를 대표하는 명피아니스트 소프로니츠키는 1946년 레닌상을 수상했고요, 1954년부터는 대도시의 큰 연주회장을 벗어나서 시골의 작은 공간에서 소수의 청중들을 위해서 연주회를 개최하면서 러시아 전역을 여행하기 시작했고요, 그 때부터 숨지기 직전까지 인기가 절정이었는데요.

이렇게 연주가로서의 삶을 산 소프로니츠키의 인생은 정말 행복했을까...

소프로니츠키는 어떤 돌출행동을 할 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는 점에서 마리아 유디나와 닮았다고들 말을 하죠. 알코올, 마약, 복잡한 남녀관계, 도 그 밖에도 성가신 일들이 그의 삶에 다 들어있었고요, 그러다보니까 어떤 때에는 공연 전에 코냑 한 병을 다 마시고 나가떨어지기도 했다고 해요. 연주회는? 물론, 취소되었죠.

이렇게 무절제한 순간도 있었지만, 소프로니츠키는 겐리흐 네이가우스,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에곤 페트리,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 같은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존경을 받는 피아니스트였어요. 리히터와 길렐스는 소프로니츠키를 그들의 master 라고 추앙했고요, 리히터는 피아노의 신이라고까지 말을 했죠. 그리고 또 소프로니츠키의 제자였던 라자르 베르만은 “소프로니츠키 선생님은 진정함의 극치로서, 나를 음악의 혼에 가까이 다가서게 한 사람”이라는 말을 했고요.

“참된 예술은 일곱 겹의 갑옷으로 억제된, 붉게 끓어오르는 용암과도 같은 것이다”라는 그의 표현처럼, 소프로니츠키의 연주는 낭만적이고 영감에 가득 차 있는 피아니스트이지만, 정확하고 빈틈이 없고, 쓸 데 없이 과장을 하거나 진부한 표현도 없고 자연스럽지요. 그래서 그의 연주를 듣다보면 연주회장이 아니라, 속세를 떠나 제사장이 신탁을 받는 집회에 참석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해요. 그만큼 은밀하고 신비스럽고 섬세하죠.

(저는 개인적으로 처음 소프로니츠키의 연주를 접한 때가 1992년이었는데, 리스트 소나타 실황 음반을 듣고 너무 무서워서 방구석에서 울면서 덜덜 떨었던 기억이 있어요. 시간제약으로 방송은 못 하지만 기회 되면 꼭 들어보세요)

소프로츠키는 즉흥성이 강한 피아니스트답게  “레코딩은 나의 시체이다”라고 말하면서 스튜디오 녹음을 혐오하고 실황을 고집한 피아니스트였죠. 하지만 스튜디오 녹음도 있기는 합니다.

이렇게 활발한 활동을 하던 소프로니츠키는 1959년 초에 몇 달 간을 몸져 누웠다가 그 해 가을부터는 주위의 경고를 무시하고 다시 레코딩 작업을 계속했고 또 콘서트홀로 돌아와 1960년 12월 5일 모스크바 음악원 소강당에서 연주회를 개최합니다.

그리고 1961년 1월 9일 스크리아빈 탄생 89주년을 맞아 스크리아빈 박물관에서 연주회를 개최하는데요, 바로 이 연주를 끝으로 다시는 청중 앞에 서지 못했고 그 해 8월 29일 60세를 일기로 타계합니다. 사인은 암이었고요.

소프로니츠키의 사망 소식을 듣고 에밀 길렐스는 “이 세상의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죽었다”고 슬퍼했다고 합니다.

 


음악 듣겠습니다.

스크리아빈의 프렐류드 작품 13-1, 11-2, 13-3, 11-4, 11-5를 블라디미르 소프로니츠키의 연주로 보내드립니다. (연주시간 2:14+1:42+0:58+1:28+1:21= 7분 43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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