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S 방송원고:당신의밤과음악 05-12-03 리히터1
2007-11-27 18:47:25
허원숙 조회수 3223

KBS FM 당신의 밤과 음악

허원숙의 <생활을 노래함>코너

2005년 12월 03일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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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뭘 그리 열심히 보고계세요?

 


(허)일기장이요. 들어보세요.

“얼마 전에 트빌리시에서 한 부인이 우리를 만나러 왔다. 그녀는 릴리 브리크와 찍은 파라자노프의 사진과 자기 남편인 이보 포고렐리치의 음반을 가져왔다. 음반 재킷에는 연주자의 사진이 실려 있다. 곱슬머리에 젊고 생기발랄한 남자의 사진이다. 부인은 그 남자의 선생이다. 그녀는 자기가 리스트의 증손녀라는 얘기도 했다. 피아노 선생이라기보다 거리에서 과일이나 채소를 파는 여자 같았다. 나는 음반을 들어보았다. 그런데 이게 뭐란 말인가..... 이 또한 프로코피에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연주였다. 연주자는 노출증의 성향을 지니고 있는 데다가 페달을 부적절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

 


또 다른 일기도 읽어드릴께요.

“크리스마스 1987, 나의 도쿄 리사이틀 녹음, 브람스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변주곡.

이 곡을 다시 들었다. 완벽하게 연주하기가 매우 어렵거나 거의 불가능하기까지 한 작품이다. 니나가 나에게 묻는다.
‘그런데 왜 이 곡을 연주하죠? 그것도 그렇게나 자주 말이에요.’

우선 걸작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이 곡이 나 자신을 연마하기 위한 훌륭한 학습의 장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셋째로는 내가 좋아하는 곡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 곡을 완벽하게 연주해보려는 내 열망에는 직업적인 자존심도 얼마간 개재되어 있을 것이다. ”

 


(이)누구 일기장에 그런 이야기가 쓰여있는 건가요? 혹시 피아니스트?

 


(허)맞춰보세요. 

1915년 출생, 1997년 사망.

193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전세계를 누비며 3589회의 연주회를 했구요,

비행기를 끔찍하게도 싫어해서 모스크바에서 일본까지 갔다 오면서 비행기를 타지 않고 자동차 여행을 고집해서는 우랄산맥을 넘고 시베리아를 횡단해 가면서 몇 달 사이에 1백회 가까이 연주회를 가진 사람.

 


(이) 아, 알았다.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 맞죠?

 


(허) 참 잘했어요.... ㅋ ㅋ

지금 읽어드린 음악일기는 리히터가 1970년부터 1995년까지 음악회에 가거나, 집에서 또는 차 안에서 음악을 듣거나, 아니면 여러 연주가를 만나면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상을 적은 메모장인데요,  브뤼노 몽생종이라는 사람이 만든 <리흐테르, 회고담과 음악수첩>이라는 책 뒷부분에 있는 내용이에요.

 


오늘 함께 감상할 곡은요,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가 정말 사랑한 작품, 드보르작의 피아노 협주곡 G 단조 중에서 3악장을 골라보았습니다. (연주시간 11:02)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지휘하는 뮌헨 바이에른 국립교향악단 (Bayerisches Staatsorchester Muenchen)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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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곡을 녹음하고 나서 음반이 나오기 전에 이 녹음을 듣고 리히터가 쓴 일기가 있는데요, 읽어드릴께요.

 


1977. 3. 8.

드보르작의 협주곡은 내가 바라던 대로 되지 않았다. 이 곡을 녹음할 때 카를로스 클라이버와 나는 약간 긴장해 있었고 잘 해야겠다는 마음이 너무 앞서 있었다. 그 바람에 작품 (피아노 파트가 대단히 어렵다) 이 신선함을 잃고 말았다. 그 점이 못내 애석하다. 내가 대단히 좋아하는 작품이라서 더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음반은 곧 나올 것이다.

 


1977.11월

또 다시 들어봐도 아쉬움이 남는다. 정말이지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카를로스는 너무나 세심했고 나는 경직되어 있었다. 그 바람에 드보르자크 특유의 매력과 단순성을 살리지 못했다.

내가 기억하기로 나는 이 협주곡을 익히는 데에 많은 시간을 들였다 (거의 3년), 바르토크의 2번 협주곡 같은 작품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두 달 만에 익혔는데 말이다.....

 


사실, 리히터는 곡을 단시일에 완성하는 특별한 재능이 있었던 사람이었어요.

프로코피에프의 소나타 7번은 나흘 만에 외워서 연주하였다고 하고, 닷새 후에 갑자기 독주회를 해달라고 요청이 오면 자기도 모르는 곡을 연주곡에 포함시킨다고 해요.

그래야 연주 준비하는데 지겹지 않고 재미가 있다고요.

 


리히터가 진정한 예술가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을 한 군데 읽어드릴께요.

 


내가 연주를 하는 것은 청중을 위해서가 아니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연주한다. 내가 내 연주에 만족하면, 청중 역시 만족한다. 연주를 하는 동안 내가 어떤 태도를 취하든 그건 작품과 관련된 것이지 청중이나 성공을 겨냥한 것은 아니다. 또한 내가 청중과 관계를 맺고 있다면 그 관계는 작품을 통해서 맺어진 것이다. 약간 거칠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청중에 대해서 아무 관심이 없다. 이렇게 말한다고 화를 내지 않기를 바란다. 내 말을 나쁜 의미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나는 단지 내가 청중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청중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청중과 나 사이에는 일종의 벽이 존재한다. 내가 청중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않을수록, 나는 더욱 더 연주를 잘 한다.


어때요? 멋있죠.

바람 부는 언덕 위에 꿋꿋이 서 있는 푸른 소나무 같지 않으세요.

 


리히터의 연주로 감상하시겠습니다.

라흐마니노프의 전주곡 op.23-1번 f sharp 단조, 2번 B flat 장조, 5번 G 단조입니다.

(연주시간 3:50 + 3:24 + 3:43 = 약 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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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말 훌륭한 연주였습니다......(느낌 이야기...)

허원숙 씨는 리히터의 연주를 어떻게 들으셨나요?

 


(허) 일단 음색이 정말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수식할 군더더기가 조금도 안 붙어있습니다. 리히터도 말했잖아요.

음악을 연주한다는 것은 자신의 개성으로 음악을 오염시키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음악을 연주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작곡가가 써놓은 <모든> 지시를 기억할 수 없으니까 <해석>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그런 것에 찬성할 수 없다.

 


리히터의 회고담 마지막 부분에 보면 리히터가 이런 말을 해요.

독일의 지휘자 쿠르트 잔더링은, 나보고 “저 사람은 연주 참 잘 해. 그리고 악보도 읽을 수 있어.”라고 말했어.

그 말이 의미 하는 게 무엇일까요?

리히터야말로 악보에 쓰여있는 의미를 정말 잘 파악하고 전달자 역할을 완벽하게 하는 사람이라는 칭찬이 아니겠어요?

 


(이) 리히터의 이야기와 음악 참 인상깊었습니다. 다음 주에도 리히터의 이야기를 계속 들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