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세 번의 연주회 ...........휴먼메신저 2008가을호
2008-09-23 01: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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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의 연주회

 

이경은

휴먼메신저 2008 가을호

 

그녀의 살롱 연주회를 세 번 연이어 갔다. 일주일에 한 번씩 열리는 이 음악회는 30여명의 작은 인원의 사람들이 모여 듣는 ‘주제와 해설이 있는 작은 피아노 연주회’이다. 넓은 공연장에서 듣던 음악에만 익숙해 있던 나는 가깝게 다가오는 공간의 친밀감에 약간 상기되었다. 그 지극한 공간 사이로 사람들의 숨결과 호흡, 맥박이 피아니스트에게로 초점이 맞춰지고, 2시간 동안 관객들은 공간 속에서 한 몸으로 동질화된다. 그들은 숨조차 잠시 멈추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눈, 안광眼光이 지배紙背를 철徹하다

검고 늘씬하게 뻗어있는 그랜드 피아노 앞에 그녀가 ‘발라드 Ballade’의 향연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나 싶더니, 이내 손을 피아노 위에 내려놓고 연주를 시작한다. 하지만 내가 앉은 자리에선 피아노 치는 손은 보이질 않고, 피아노 위로 나온 그녀의 상반신만을 볼 수 있다. 쇼팽의 발라드는 전부 외워서 쳤고, 브람스와 리스트의 발라드는 악보를 보며 연주했다. 눈을 감고 칠 때엔 마음속에 새겨둔 악보를, 눈을 떴을 때는 종이 위에 그려진 악보를 본다.아니 그녀는 악보를 보는 것이 아니다. 그녀의 눈은 검고 흰 악보 속의 음표를 따라가며, 쇼팽과 브람스, 리스트의 영혼을 시공을 초월해 만나러 간다.

우리는 그녀의 몸속으로 들어와 다시 생생하게 살아나는 그들의 영혼을 깊이 느낀다. 그녀의 눈에 불이 시퍼렇게 켜진다. 순간, 그 작고 여린 몸속에 한 마리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들어있다.

 

발, 춤추는 발

오늘은 더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그녀를 잘 볼 수 없어서 눈을 감았다. 귀로 들어보고자 했다. 허나 뭐든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을 좋아해서인지 어느새 눈이 떠졌다. 그러다 생각지도 않게 피아노 아래에 있는 그녀의 발에 눈이 갔다. 저런, 발도 있었구나. 하나를 닫으면 다른 하나가 보인다. 수면 위로 올라온 현상의 세계만을 바라보면, 숨어있는 수면 아래는 그냥 지나치기 쉽다. 피아노 아래에서 그녀의 발은 페달을 밟느라 분주했다. 보통 연주 때에는 마루라 구두 소리가 딸깍하니 날까 조심하지만, 이 실내공연장은 카펫이라서인지 그녀의 발은 자유로웠다. 아니 어쩌면 사람들의 관심을 덜 받기에 오히려 더 자유로운지도 모른다. 저 위의 피아니스트를 화려하게 빛나게 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밑에서 두 발은 노동을 기꺼이 감수한다. 한쪽 발은 남자 무용수처럼 페달을 꽉 밟아 중심을 잡고, 나머지 한 발은 여자 무용수처럼 그 곁에서 들어왔다 나갔다 하며 온갖 몸짓을 해댄다. 어두운 공간 속에 그들만의 밀회가 있다. 이 밤 그녀의 발엔 ‘분홍 신’이 상징처럼 신겨져 있다.

 

손, 고통과 환희의 몸짓

마지막 날에야 그녀의 피아노 치는 손을 가까이 볼 수 있는 자리에 앉았다. 작고 가는 손가락이라 세게 잡기도 어려운데, 오늘 그녀가 잡은 주제는 ‘춤곡’이다. 손가락 관절을 앓고 있는 피아니스트에게 춤곡은 부담일 수 있다.

배가 아픈 것 같다는 말을 연주할 때마다 빼놓지 않는다. 내가 마음 편하게 하라고 말하자, 그녀는 연주를 앞 둔 피아니스트의 고통을 모르는 무식한 이 여자를 곱게 흘긴다. 설사 안다한들 무슨 도움이 되랴. 오로지 연주의 몫은 고스란히 그녀 것일 수밖에 없는데.... 나는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를 한다. 샤콘과 왈츠, 폴로네즈, 살사 우아팡고Huapango로 이어지는 춤곡을 그녀는 피아노 위에서 아낌없이 추었다. 그녀의 조그맣고 가느다란 손가락은 이미 그 존재성을 잊어버렸다. 손은 이미 손이 아니다. 때로는 포효咆哮하는 광풍 같기도 때로는 잔잔하게 다가오는 포말 같기도 했다. 그녀의 혈관 하나하나가 손에 모여 그녀의 육신의 고통을 담아내거나.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을 휘감아 함께 손 위에 얹는다. 그녀의 온 몸을 통해 음악이, 예술이 배어나 나온다. 세상이 환희로 가득하다.

일본의 독도 문제에 대한 규탄 시위로 광화문의 건물들 사이로 함성이 울리고 촛불이 일렁거리며 사람들의 얼굴을 비추던 그 날, 세 번의 연주회가 끝났다. 돌계단을 내려오는데 괜히 눈물이 나는 듯도 싶었다. 밤마다 벌어지는 저들의 순수한 열정, 혹은 변질된 세상의 욕망, 예술에 대한 뜨거운 감동과 한 명의 피아니스트가 내뿜는 무한한 힘이 뒤섞이며 나에게 다가와, 내 온 몸속에서 휘몰아쳐댄다. 정수리 끝이 아찔해져 길가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내 옆으로 사람들이 지나가고, 차량들이 그 날 밤 끝없이 불을 밝히며 지나갔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시간 속으로....

한동안 사는 게 무기력하고 지루해, 죽음이 가까이 느껴졌다. 그런데도 물 위로 솟아나온 얼굴은 얄미울 만치 매끈하게 세상을 향해 있었고, 나는 사람들을 향해 내내 살포시 웃었다. 그것이 위악이든 가면의 숨겨진 고백이든 간에 누구에게나 그렇게 밖에 살 수 없는 시간들이 더러 있는 게 아닐까 하며 스스로를 다독거렸다. 나는 내게 다가온 그런 삶의 순간들을 피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도 나의 삶의 일부이고, 지나고 보면 고통도 행복이리라. 순수하고 거짓이 없는 고통이라면.... 그 덩어리는 때로 나를 나락으로 끌어내려 죽음의 계곡을 지나가게 하지만, 그곳을 지나야만 빛이 있는 땅으로 가게 되리라는 희미한 믿음이 등대처럼 나를 이끈다.

 

걸어가야 할 길

내 나이 53에 만나야 할 세상이 있다. 포기하지 않고 52년 12개월을 걸어와야만 만날 수 있는 사람과 또 다른 새로운 세계가 묵묵히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래, 내겐 아직 밤이 되기 전에 가야할 길이 있구나. 그동안 모른 척 눈을 감았을 뿐... 때론 그 길 위에서 어디로 갈까 막막해서 망설이거나 더 이상 길이 없을 것 같아 가슴이 저리기도 했지만, 길은 언제나 말없이 그 곳에 있다. 나는 이젠 좀 일어나 걷고 싶다.

그녀의 세 번의 연주회는 길가의 선물이다. 그 88개의 흑백 건반이 내 몸속으로 들어와 온 세포를 일일이 일으켜 세우고 기운을 뿜어 주었다. 나는 이제 밥을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감사의 기도가 입에서 툭, 나온다.

긴 터널을 빠져 나오면..... 새로운 빛의 세계가 펼쳐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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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은

<계간수필>로 등단 (1998년)

저서 <내 안의 길>. 율목 문학상 수상

현재 과천문인협회장, 라디오 드라마 <KBS 무대> 집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