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2011-04-21 연주회평-김순배
2011-05-05 18:2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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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표조차 뜨거웠던....허원숙... (2011/04/21) 

      

                                                                                     김순배 (피아노음악.......2011년 5월호)


뜨거운 연주였다. 오죽하면 쉼표들조차 뜨거웠다. 허원숙이 프로그램 노트에 적은대로 ‘날 것’ 으로 차린 만찬이었다. 심지어 디저트까지 그랬다. 다시 프로그램 노트를 빌리면 허원숙은 ‘교육과 교양으로 가려지고 걸러진’ 구태의연한 표현을 탈피하고 싶다고 했다. 군더더기 없는 본질 그 자체를 체험하고 그것을 들려주겠다는 것이다. 전반부는 베토벤으로 채워졌다. 첫 곡은 C minor적 인간 베토벤을 표상하는 ‘32개의 변주곡’.  허원숙의 ‘날 것’ 이론은 강인함을 전제조건으로 해야 가능했나 보다. 음들과의 씨름에 이력이 난 전사처럼 그녀는 굳세게 돌진했다. 변주곡 속에는 뜨거운 불과 급속냉각 상태의 얼음이 있었다. 본질은 그렇듯 극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것. 하지만 ‘날 것’들 로부터 미묘한 맛의 차이를 감지해 내는 일은 이 날만큼은 포기해야했다. 각 변주곡의 대조는 극명했다. 대신 순간대비의 선명함에 큰 흐름이 갖는 상승효과는 희생당할 수 밖에 없었다. 살아남은 것은 베토벤의 양면성이다.



변주곡은 이제 보니 ‘열정 소나타’를 위한 전초전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c minor 변주곡은 베토벤이었기에 가능한 작품이지만 ‘열정’은 더더욱 그러하다. 허원숙은 이미 베토벤의 심화(心火)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작렬하는 1악장은 사실 ‘열정’보다는 ‘정염 情炎’이라는 별명에 더욱 걸맞다. 그렇다면 2악장은 ‘얼음 속에 갇힌 정염’이라는 편이 옳다. 어떤 평자들은 베토벤이 동시에 사랑한 두 여인에 대한 감정의 빛깔이 두 개 악장을 통해 상반되게 표현되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2악장의 말미에서 베토벤은 다시 무너진다. 얼음은 서서히 녹았다기보다는 일거에 깨졌다. 허원숙은 무너질 베토벤을 이미 예측하고 있었던 듯 쿨(cool)한 상태에서도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3악장에서는 깨어진 얼음이 격랑이 되어 주체할 길 없이 범람한다.  연주자는 이미 베토벤이라는 쓰나미 앞에 혼미해지기로 작정했다. 왜냐하면 베토벤의 본질을 ‘날 것’ 그대로 전하려면 달리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열정’으로부터 구도자의 자세로 돌아옴직도 한 리스트 ‘ B 단조 소나타’에서도 허원숙은 ‘불타는 구도자’ 였다. 수년전 동일한 텍스트를 읽던 그녀와는 억양이, 어조가 급변했다. 이렇듯 격한 리스트 소나타도 오랜만이다. 주제부분에서도 그랬지만 후가 섹션에서 연주자는 폭발할 틈을 엿보는 듯 했다. 리스트에서는 쉼표조차 뜨거웠다. 그녀는 마치 실물대보다 훨씬 커지기 원하는 용사 같았다. 파우스트와 그레첸 그리고 메피스토펠레스에 얽힌 사연을 허원숙은 연주가 모두 끝난 후 마치 후일담처럼 들려주었다. 청중들은 얼얼한 상태로 그것을 들었다. 베토벤의 본질과 사뭇 다를 리스트의 그것은 다음 기회에 찾아야 할 것 같았다.



일단 통쾌한 무대였다. 특히 자신만의 해석이나 연주관을 당당히 프로그램 노트로 밝히는 연주자가 결코 흔하지 않은 우리 현실에서 허원숙의 뚜렷한 컨셉과 분명한 빛깔은 소중한 그 무엇이다. 그녀의 표현대로라면 어떤 조리법도 가하지 않은 원 재료의 맛, 본연의 상태를 이날 밤 청중들은 넘치도록 맛보았다. 디저트로는 좀 부드러운 푸딩 같은 것도 괜찮을 뻔 했다. 하지만 이날 허원숙의 일관된 음악적 메뉴가 잠들었던 입맛을 원초적으로 자극한 것은 사실이다. 다만 하나의 재료를 다루는 여러 가지 조리법을 그녀가 더 다양하게 개발해 주기를 청중은 바랄 뿐이다. 때로는 따뜻하거나 부드러운 또는 담백하면서도 쫄깃한, 오만가지의 맛을 음악은 지니고 있지 않은가? 우리의 음악적 입맛을 업그레이드 시켜줄 또 다른 밥상 혹은 만찬을 기대해본다. 웰빙이면 더욱 좋겠다.

 

 

김순배 (2011-5월호, 피아노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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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평은 평으로 존재하며 그 사람의 가치를 나타냅니다............허원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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