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FORMANCES 허원숙....50 (두 개의 연주회)
2008-08-23 18:39:41
허원숙 조회수 2482

 

 

........걸어간다는 것

 

년 전 독일에 볼 일이 있어 간 적이 있다.

며칠 간 스케줄이 없는 사이, 파리에 있는 제자가 전화를 했다.

“선생님! 저 이제 파리 유학기간도 다 끝나가는데 파리 안 오실거예요?

저 사는 것도 좀 보시고 그러셔야죠.”

못 이기는 척, 파리로 향했다.

제자 집에 짐을 풀고, 지도 들고 지하철 표 끊어 매일 아침 박물관으로 출근이다.

다 늙은 나이에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혼자 걸어다니는 게 안쓰러웠던지,

하루는 제자가 그런다.

“선생님, 고흐 무덤 안 가실래요?”

에구, 이게 웬 떡이냐?

“그래 좋다. 거기 가자.”

둘이 나섰다.

겨울이었는데, 하늘이 너무 너무 맑은 날이었다.

너무 맑아 지겨울 정도로.

고흐의 무덤이 있다는 곳을 향해 파리에서 기차를 탔다.

정류장 이름이 오베르 쉬르 와즈(Auvers-sur-Oise).

이름도 멋있어라.

내렸다.

“선생님, 이제부터는 쭈욱 걸으셔야 되요.”

“걷지 뭐. 나 잘 걷잖아.”

그런데 그 길이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다.

날은 화창한데, 아무리 겨울이라도 햇볕이 따갑다.

곧게 뻗은 아스팔트 길로 한참을 걸었다.

고흐가 잠든 무덤과, 또 교회와, 그리고

<까마귀가 나는 밀밭>을 그린 바로 그 그림터.

그 긴 길을 걸어가도록 버스 한 대 지나가지 않는다.

여기 관광 명소 맞아?

뚜벅

뚜벅

뚜벅

....

 

어느덧 아스팔트포장도로도 끝이 나고

흙이 고스란히 드러난 넓은 밭이 어디 숨어있다 나왔는지,

황량한 바람과 함께 내 눈 앞에 펼쳐졌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뺨을 흐른다.

바람이 불어 눈물이 나는지, 아니면 슬프도록 처량한 풍경 때문인지

아무튼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울컥 치미는 눈물 때문에

한참을 하늘을 올려다보고 그렇게 서 있었다.

 

얼었다 녹은 땅은 발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질퍽거렸고

그림이 그려진 지 백년도 넘었는데 그 곳은 예전 모습 그대로다.

고흐의 <까마귀 나는 밀밭> 그림을 담은 조촐한 화판 옆으로

바로 진짜 자연의 그림이 커다란 화판이 되어 펼쳐지고 있었다.

고흐가 아니라도 거기서 혼자 하루 종일 들판을 바라보고 서 있노라면

환상도 보이고, 환청도 들릴 것만 같았다.

 

이래서 이렇게 그냥 내버려둔 것처럼 놔뒀구나.

많은 사람이 다녀갔던 곳일텐데도 땅은 질퍽거리고

많은 사람이 그 곳을 찾았을텐데도 길에 큼지막한 표지판 하나 없다.

그리고 흔한 셔틀버스 하나 눈에 띄지 않았다.

그리고 나니 퍼뜩 정신이 든다.

 

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안네 프랑크가 마지막 숨어지냈다던

안네 프랑크의 생가에 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궂은 날씨에 이동하기도 힘들었던 상황이었는데,

그 곳을 물어 물어 찾아간 이유는 정말 그 곳이 감동적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

하지만 힘들게 찾아간 그 곳은 너무 의외였었다.

4-5층 짜리 건물의 좁은 계단을 힘들게 올라갔었다는 옛 건물은

옆에 신축한 으리으리 삐까뻔쩍하는 유리건물로 연결되어 있어서

좁은 계단은 커녕

최신식 엘리베이터로 순식간에 꼭대기층으로 손님들을 퍼나르고 있었다.

힘겹게 올라오는 수고를 덜은 채 순식간에 맞닥뜨린 꼭대기방.

한 쪽 구석엔 뭔가 두꺼운 유리로 덮혀져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아래층에서 삐걱거리면서 올라와야했었던 계단.

말이 계단이지 거의 사다리 수준이다.

가만 있어봐. 이게 뭐야?

그러니까, 힘들게 올라와서 몰래 숨어지내던 방으로 이렇게 연결된단 말이지?

 

그 놈의 유리 건물과 엘리베이터 때문에 그 많은 동선이 다 생략되어버린

안네 프랑크의 생가 1층은

어이없게도 관광상품 가게.

안네 프랑크의 전세계 언어로 된 일기장을 판다.

안네 프랑크를 기념할 각종 기념품이 즐비하다.

중학교 때 가슴 쓸어내리며 읽었던 안네 프랑크를 만나며

또 한 번 흘리고 싶었던 눈물은 어느 덧 다 기어들어가 말라버리고

거대한 상술에 화가 치밀어 또 다른 눈물이 나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과정의 생략이라는 거. 무서운 거다.

프랑스 사람이

왜 구태여 고흐의 무덤으로 가는 길을 그냥 걸어가게 했었는지

가슴 저리도록 실감하게 하는 순간이다.

그 길을 힘들게 걸어가야만

길 끝에 펼쳐진 또 다른 풍경에 대한

감사와 눈물이 있다.

 

연주회에 온 귀한 손님이

이런 말을 했다.

“내 나이 쉰 셋인데요,

1년 반 전에 부모님이 거의 동시에 두 분 다 돌아가신 후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버거운지 힘들었어요.

삶을 포기할까 생각도 했었구요.

그런데, 오늘 연주회를 보고서 다시 살 용기를 얻었어요.

내가 만약 52년 11개월만 살고 죽었다면

오늘 이 연주회는 못 보는 거잖아요.

그래서 감사했어요...”

내가 뭘 어쨌기에?

그저 난 내가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어느 누구는 감동하고,

어느 누구는 살 희망을 얻는다.

 

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피아니스트>를 다시 보았다.

첫 번 보았을 때에는

옆 집 사람 몰래 숨어있던 집에 있던 피아노를 치고 싶어

피아노 건반 위 허공에서 피아노를 치는 장면에 울컥 눈물이 치밀었다.

그리고 언 손으로 치는 쇼팽 발라드 1번에 감동했었다.

그런데, 다시 본 영화에서는

피난 길에서 엄청 비싼 돈을 주고 산 초콜렛 하나를

온 가족들이 성찬식하듯이 나누어 먹는 장면과

독일 장교가 몰래 가져다 준 빵과 함께 온 과일잼을

허겁지겁 손가락으로 쭉쭉 빨며 먹는 장면에서 눈물이 났었다.

이게 내가 할 일이구나.

피난 길의 과분한 초콜렛처럼

굶다 만난 과일잼처럼

어울리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 순간만은

행복을 가져다주고 삶의 용기를 주는 일.

그저 나는 시간표짜고 연습하고 무대에 서지만,

그로 인해 어떤 이는 인생이 달라지기도 하는구나.

 

내 인생도 이제 50.

쉰 해를 살다보니

이런 분들도 만나는구나.

행복한 쉰 살.

새로운 걸음을 걷는다.

 

 

 

*특별출연: 박혜진 (시 낭송)

연극배우 박혜진은 1970-80년대 번역극과 부조리극시대를 거치며 Shakespeare, Eugène Ionesco, Jean Genet 등의 작품을 통해 풍부한 감성을 바탕으로 연극적 언어를 폭발적 에너지로 표현하는 배우

 

로 주목받으며 역대 최연소 나이로 동아연극상 연기상을 수상하였다. 대표작으로는 <대머리 여가수>, <발코니>, <오텔로>, <맥베드>, <지킴이>, <오장군의 발톱>, <옛날 옛적에 훠이훠이>,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돼지와 오토바이>, <하얀 자화상>, <MBC마당놀이> 등이 있으며, 2008년 12월에 개봉 예정인 영화 <차우>에 출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