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S 자연과 문화가 준 두 개의 단상
2007-11-27 13:43:33
허원숙 조회수 1312

10월 문화의 말

 


<자연과 문화가 준 두 개의 단상>

 

지독히도 극성스레 여름을 티 내던 날씨도 바람 한 번 휙 불고 비 좀 뿌리더니, 얇은 옷이 원망스런 가을 날씨로 돌변했다. 날씨란 정말로 요상한 것이어서 한 번 기온이 내리고 철이 바뀌면 마치 변심한 애인처럼 다시는 돌아 올 줄 모른다. 물론 한 해가 지나가면 다시 그 계절로 돌아오긴 하겠지만 그 땐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세월이 지난 다음이겠지.

 

그 더웠던 지난 여름, 나는 남들 다 가는 피서 한 번 못가보고 그 더위를 고스란히 몸으로 막으며 지냈다. 피서를 안 간 것은, 가지 않을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 별 의미도 없이 전국을 이리 저리 헤매며 쓸려 다녀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해서였다.

 

밖에 나가지 않으니 다람쥐 모양 집안을 뱅뱅 돌며 지낸 것은 두 말 할 나위도 업다. 남들은 피서지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피서를 했겠지만, 내가 가만히 집에서 한 여름 뜨거운 햇볕을 극복해 내었던 방법은 마당에 나가서 잡초를 뽑으며 잔디밭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풀 뽑기를 시작한 지 채 5분도 되지 않아서 온 몸에서는 땀이 비오듯 흐르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그게 땀인지도 모르고 어디서 물 같은게 떨어지는가보다 하고 주변을 휘휘 둘러보기도 했다. 잡초라는 것은 정말 생명력이 강해서 며칠 만에도 다시 자라나 잔디를 뒤덮어 버렸기 때문에 며칠에 한 번씩은 꼭 마당에 나가서 풀을 뽑곤 했다.

 

어느 날인가, 그 날도 구름 한 점 없이 야속한 햇살만 내리쬐는 날이었고 나는 그새 자란 풀을 뽑으려 마당에 쪼그리고 앉았는데 갑자기 내 발 옆으로 뭔가 풀쩍 뛰는 것이 있었다. 반사적으로 쳐다보니 내 두눈을 믿을 수 없게, 거기엔 개구리 한 마리가 도망가지도 않고 숨만 헐떡거리고 있는 게 아닌가! 개구리를 보고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던 이유는 우리 집 마당이 결코 넓다거나 개구리가 살 만한 환경이 되지 못하고, 주변을 둘러보아도 물이 있을 만한 곳도 없고 더구나 담장 밖은 자동차가 수시로 지나다니는 시꺼먼 아스파트로 뒤덮혀 있는 도로이기 때문이다.

 

"아니, 이게 어디서 들어온거야?"
징그럽다거나 반갑다거나 하는 감정에 앞서 도대체 어떻게 살려고 여기에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우선 몸에 물이라도 적시게 하기 위해 마당에 수도로 물을 뿌리기 시작했는데, 고양이나 강아지와는 달리 개구리는 물을 뿌려도 절대 도망가지 않고 가만히 앉아 물세례를 즐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네 살 짜리 조카는 그림책에서만 보았던 개구리가 진짜로 살아 숨쉬고 풀쩍풀쩍 뛰어다니는 것을 보고 뛸 듯이 좋아했다. 자기가 아는 사람들에게 고모네 집엔 마당에 개구리가 산다고 자랑이 대단했다. 나는 모처럼의 눈호강을 놓치지 않으려고 매일 수도물을 틀어 마당을 적셔주곤 했다.

 

그날 이후로 내 생활이 그렇게 달라질 수가 없었다. 마당만 보아도 개구리 생각이 났다. 비가 오면 내가 개구리이기라도 한 듯이 좋아했다. 모든 내 사고의 중심은 개구리 그 자체였다. 여름 햇살에 지쳐버린 마당도 생기를 되찾는 것 같았다.

 

이제 여름은 지나갔고 그 개구리는 더 이상 내 눈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지난 여름 내 마음을 기쁘게 했던 그 사건은 내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생떽쥐베리의 어린 왕자에 다음과 비슷한 구절이 있었던 생각이 난다. 우주의 수많은 별들 중에 어느 별엔가 내가 물 주고 키우던 장미나무가 자라고 있다면그 별은 나에게 더없이 특별한 별이 된다고....
문화에 있어서도 그 현상은 마찬가지라고 본다. 만약 우리 시대를 살며 우리의 문화에 뭔가 활력을 주고 우리 문화를 살찌우는 무엇이 있다면, 비록 그것이 멀리 있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을 것이기 떼문이다.

 

지난 달에 명동 성당에서는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메시앙의 <어린 예수를 바라보는 20개의 시선> 전곡 독주회가 있었다. 연주회가 끝난 후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감동에 찬 기립 박수를 보낸 청중들의 가슴 속에는 과연 무엇이 채워 졌을까? 어려운 곡을 연주하느라고 수고한 연주자에 대한 예의일까?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길가다 부딪혀도 별 다른 사과의 말 한 마디 없이 지나칠 수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속성으로 볼 때, 그것은 절대 이해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연주가 끝난 후 뜨거운 눈시울로 자리에서 일어나 힘찬 박수를 보내도록 하였을까? 그것은 연주자의 순수한 열정이 청중들의 가슴을 벅찬 감동으로 채워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들의 마음을 자랑스럽게 해 줄 수 있는 예술가의 혼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그런 청중을 보면서 가슴 벅차오르는 감동을 느꼈다. 감상하기에 쉽지도 않고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곡들도 아니고 게다가 같은 어법으로 쓰여져 자칫 지겨울 수도 있는 프로그램으로 연주를 하더라도 연주자만 좋으면 청중들은 공부하며 연주회를 감상 할 수 있는 자세가 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지난 여름 우리집 마당에서 개구리를 본 이상으로 뿌듯함을 느꼈다. 아니, 그것은 단순한 뿌듯함을 넘어 문화에 대한 신뢰와 자긍심의 발견이었다.
개구리는 이제 내년 여름이 오더라도 우리집 마당에 다시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들 가슴 속에 심어진 우리 예술이나 문화에 대한 자긍심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그것을 가꾸고 키워서 튼튼하게 뿌리내릴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하지만 그 점에 있어서도 자신은 있다. 순수함과 사명감, 전문성 그리고 책임감만 있으면 우리의 문화나 예술은 지켜지고 뿌리 내려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문화공간, 1996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