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S 쇼팽-처절하고 패기넘치는 뜨거운 시
2007-11-27 13:37:15
허원숙 조회수 1340

<10인의 피아니스트들이 말하는 나와 쇼팽>

 

"처절하고 패기넘치는 뜨거운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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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곡의 이름은 '쇼팽'인데, 쇼팽이 쓴 게 아니고,
슈만이 쓴 '쇼팽'이라는 곡이야. '사육제'중에 나오는.."

 

1985년이었나? 프랑스의 에피날 국제 콩쿠르에서 만난 일본 여자애는 나에게 자신이 치는 슈만의 '사육제'중에 나오는 '쇼팽'이라는 곡에 대해 서툰 독일어 솜씨로 뭔가 자꾸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쇼팽이 쓰지 않은 '쇼팽'이라는 곡을 굉장히 신기해 하면서.
그말을 들으며 나는몹시 짜증이 았다. 슈만이 자기 작품에 이른바 쇼팽 풍의 선율을 조금 써놓고 제목을 '쇼팽'이라고 써놓은 것이 무척이나 못마땅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빗방울 전주곡'에서부터 '즉흥 환상곡'에 이르기까지 많은 쇼팽의 소품을 대하면서 나도 모르게 쇼팽의 작품은 이런 경향의 곡들이다 라고 규정지어버린 적이 있었다.
나약한 성품의 살롱 취향적인 작품들을 대할 때, 사치성 소비 경향이 심하여 주위에서 그를 비난하는 소리가 드높았다는 이야기를 책에서 읽었을 때, 그의 음악도 별 수 없이 귀족의 소유물 정도였을 것이라고 여기게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정말 쇼팽의 작품들을 연주자의 입장에서 분석하고 공부하면서부터 그의 음악 안에 내재해 있는 화성감이 얼마나 풍부하며, 형식과 논리에 대한 전개와 설득력이 얼마나 탁월한 지를 깨닫고 나 자신이 쇼팽에 대해 섣부른 편견을 가졌다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웠었는지!
그래서 더욱 슈만이 자신의 '사육제' 중에, 나약하고 감상적인 쇼팽의 아류 음악을 등장시키면서 제목 또한 '쇼팽'이라고 지은 것을 보고 분개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쇼팽의 서거 150주년을 맞으며 그의 주옥같은 음악을 떠올리기에 앞서 슈만의 '사육제'중에 나오는 '쇼팽'을 내가 이야기한 이유는, 흔히 우리가 쇼팽의 음악을 살롱음악이라고 치부해버리는 데에 대한 사죄를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폴로네즈 F#단조 작품 44에서 울리는 작은 북의 강렬한 리듬이라든지 소나타 제2번 마지막 악장의 소위 무덤 주위를 스치는 바람이라고 표현되는 양손의 유니즌의 패시지 등 강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그의 음악은 그를 영롱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시를 남긴 시인이기보다는, 조국을 사랑하던 예술가의 처절하고 패기넘치는 뜨거운 시를 남긴 그런 시인으로 각인시키기에 적합할 것 같다.

 

 

객석, 1999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