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S \"오, 올렉 마이젠베르크\"
2007-11-27 13:32:58
허원숙 조회수 1236

음악춘추 특집: 좋은 연주란?

 

"오, 올렉 마이젠베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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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공 하나가 온 지구를 열병에 들끓게 했습니다. 정말 잘 싸워 준 한국 축구선수들 덕분에 매스컴은 온종일 경기 장면을 반복해서 방송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반복되는 장면을 계속 보는데도 지겹지 않고 볼 때마다 기분이 좋은 이유는 도대체 뭘까요? 그것은 그들이 정말 최선을 다해서 경기를 펼쳤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하, 최선이라... 최선을 다한 경기는 승부에 관계없이 정말 가슴에 오래 오래 남는군요.

 

그렇다면 좋은 연주회는 무엇일까요?

 

수많은 연주회를 경험했지만 머리속에 사진처럼 선명하게 새겨진 연주회가 있습니다. 1988년 여름이었는데요, 오스트리아 빈에서의 연주회였답니다. 일반 연주회장이 아닌 쉔부른 궁전에서 열린 음악회로, 올렉 마이젠베르크(Oleg Maisenberg)의 피아노 독주회였습니다. 모차르트의 <환상곡 K.396>, 쇼팽의 <환상곡 작품 49>와 슈만의 <환상곡 작품 17>으로 구성된 환상곡의 밤이었지요.

 

마지막 곡인 슈만의 환상곡이 끝난 후 연주장을 가득 메운 청중은 피아니스트의 마지막 호흡까지도 들으려는 듯 숨을 죽였습니다. 이윽고 감동에 빠진 굵은 톤의 목소리가 천천히 "브라~보"를 외치자 객석에서는 서서히 박수의 물결이 일렁거렸습니다. 경박한 환호성이 아닌, 침착하면서도 뜨거운 박수는 점점 더 두껍게 계속되었습니다. 한참 뒤 아쉬운 듯 의자에서 일어나 청중을 향해 정중한 감사의 인사를 하는 마이젠베르크의 눈엔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습니다. 그리고 무대 뒤로 사라졌습니다. 두 눈에 가득한 눈물을 감추려는 듯 마이젠베르크는 황급히 대기실로 들어가 문을 굳게 닫았습니다. 그리고 지치도록 박수를 치던 팬들의 소망에도 불구하고 그 문은 오랫동안 열리지 않았습니다.

 

무대 위에서 청중에게 감동을 선사하는 연주자는 객석에 그 감동을 선사하기에 앞서 스스로 더 큰 감동에 빠져버리는지도 모릅니다. 자신은 무덤덤하면서 청중에게만 감동을 강요하는 연주가 많은 요즘의 음악회를 보면, 슈만의 환상곡의 슬프도록 아름다운 3악장을 연주하고 스스로 눈물을 흘리느라 청중에게 제대로 인사하지도 못하고 황급히 무대 뒤로 사라진 마이젠베르크의 순수한 뒷모습이 생각납니다. 그리고 그 광경은 결코 잊혀질 수 없는 선명한 사진처럼 뇌리에 새겨졌습니다.

 

어느 코메디언의 말이 기억나는군요. 코메디 무대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내용을 가지고 동료 코메디언을 웃길 수 있는지 시험해 본다는 말, 자신들 (전문가)을 먼저 웃기지 못한 코메디는 결코 관객 (보통사람) 을 웃기는 데 성공하지 못한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대표팀 축구선수들도 그들의 게임에 스스로 감동하고 있었네요. 경기 전에는 누구보다도 무거운 부담감에 시달리지만 막상 경기가 시작되면 최선을 다해 싸우고, 경기가 끝나면 누구보다도 더 벅찬 감동을 누리는 사람들.

 

좋은 연주자의 모습도 그러하리라 생각합니다. 최선을 다하고, 남을 감동시키기보다 스스로 감동을 받으면서 연주하는 모습. 그런 연주회를 보면, 오늘 참 좋은 연주회를 보았다 생각이 들겠지요.


 

음악춘추, 2002년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