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S \"파격 무대의 갈채 - 이보 포고렐리치\"
2007-11-27 13:31:24
허원숙 조회수 2303

길거리에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 있다. 둥그렇게 모여든 사람들 한 가운데는 무엇을 팔러 나온 떠돌이 장수 한 명이 모여든 사람들에게 자기가 팔 물건에 대해 열심히 설명을 하고 있다. 자세히 들어보면 말도 되지 않는 소리를 어찌나 잘 지껄여대는지, 모여든 사람들은 처음에는 심심풀이로 듣기 시작하다가 어느 새 고개를 끄덕끄덕, 결국 그 장수의 말솜씨에 빨려들어 기꺼이 그 물건을 사고 뿌듯한 가슴으로 집에 간다.

 

이보 포고렐리치의 연주를 들은 날, 나의 기분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논리적이지도 않은 이야기를 엄청난 화술과 흡인력을 가지고 청중을 압도하며 설득시키는 그의 재주를 나는 이미 1984년 오스트리아 빈 무직페라인에서 열린 독주회를 통해 확인한 바 있다. 하지만 94년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그의 독주회는 연주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에 앞서 남의 음악을 수용하는 나의 자세를 다시 한 번 생각게 만든 좋은 계기가 됐다.

 

일반적으로 포고렐리치의 연주를 들을 때, 가장 당혹감을 느끼게 되는 부분은 그의 템포와 리듬감각이다. 빠른 부분은 지나치게 빠르고 느린 부분은 듣는 사람이 지칠 만큼 느리게 설정하는 그의 음악적 의도는 접어두고라도, 그의 리듬감각은 가히 파괴적이라 할 정도였다. 그에게 있어서 작곡자가 의도한 리듬적 긴장감은 이미 해체되어버린 지 오래인 것 같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 그가 의도하는 것은 선율과 화성의 공간확보가 주목적이므로, 한 음에서 다음 음으로 넘어갈 때 단순한 리듬의 구성에 얽매이기보다 음과 음 사이에 필요한 공간을 마련한 후 리듬을 생각한다. 그레서 청중들에게는 비리듬적인 연주처럼 들리는 것이다.
혹자는 '음악의 기본은 리듬이다'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흑백사진을 찍는 사진작가에게 있어서 빨간색, 파란 색보다는 오히려 명도의 대비를 선명하게 가져다 줄 수 있는 무채색이 더 중요한 의미가 있듯이, 포고렐리치에게는 단순한 리듬의 진열보다는 한 음 한 음에 생명을 불어넣고 공간을 부여하는 일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포고렐리치는 원칙을 무시하는 게임을 한다. 그가 연주하는 어떤 부분도 일반적인 해석에서 벗어나 있다. 하지만 그의 해석은 핵심을 찌른다. 악보에 표기된 리듬과 템포에서는 벗어나 있지만 곡 자체가 의도하는 이미지는 정확히 담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음색에는 청중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그가 의도한 색채가 있다.

 

나는 그의 연주를 들으며 감히 글렌 굴드와 비교해 보았다. 항상 새로운 시각으로 음악에 접근하는 외로운 두 영혼의 모습. 악보에 충실하면서도 기존의 해석과 전혀 다른 해석을 하는 글렌 굴드의 연주를 달관이라고 한다면, 모든 것을 허물고 해체해버려 전혀 새로운 것으로 만드는 포고렐리치의 음악은 진정한 신세대의 순수함인 듯 싶다.

 

누가 붙였는지 모르지만, '클래식의 록스타'라는 별명은 포고렐리치에게 전혀 어울리지도 않는,얄팍한 상혼이 빚어낸 오명이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그의 연주는 그렇게 빨리 쳐내더라도 결코 가볍거나 경망스럽지 않고 오히려 압도하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20대 초반부터 그의 몸에 굳어버린, 체념한 듯한 것 같은 무대매너는 결코 청중들의 관심을 바라는 인간의 몸짓이라고 볼 수 없다.

 

영화나 연극 작품 같은 것에는 작품의 표현방식과 내용의 경중에 따라 연소자 관람가와 미성년자 관람불가라는 감상대상의 규정사항이 있다. 만약 음악에도 그런 것이 있다면 포고렐리치의 연주에는 '미준비자 청취불가'라고 명시해 주었으면 좋겠다. 여기서 미준비자라 함은 음악적으로 표현방식이나 의도가 전혀 다른 음악을 포용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을 뜻한다. 포고렐리치의 연주는 위험하지만, 나는 그의 음악을 아주 귀하고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다.

 

 

음악동아, 1995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