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S 내가 연주를 하는 것은 청중을 위해서가 아니다
2008-06-27 01:58:57
허원숙 조회수 2370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

 

1989년 3월 런던에서의 실황연주다.

무대에 모습을 드러낸 리히터는

왼손엔 악보, 오른손에는 돋보기를 덜렁덜렁 들고

피아노를 향해 걸어나온다.

그의 곁에는 페이지 터너가

마치 경호원처럼 따라 나온다.

청중에게 인사한 후 피아노에 앉은 리히터.

무대의 조명은 악보를 비춰주는 탁상용 스탠드 하나만 남겨두고

모두 사라졌다.

이제 무대 위에 보이는 것은

오로지 악보와 그의 얼굴과 손.

그의 철학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장면이다.

언젠가 그는 말했다.

"...내가 연주를 하는 것은 청중을 위해서가 아니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연주한다. 내가 내 연주에 만족하면, 청중 역시 만족한다. 연주를 하는 동안 내가 어떤 태도를 취하든 그건 작품과 관련된 것이지 청중이나 성공을 겨냥한 것은 아니다. 또한 내가 청중과 관계를 맺고 있다면 그 관계는 작품을 통해서 맺어진 것이다. 약간 거칠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청중에 대해서 아무 관심이 없다. 이렇게 말한다고 화를 내지 않기를 바란다. 내 말을 나쁜 의미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나는 단지 내가 청중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청중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청중과 나 사이에는 일종의 벽이 존재한다. 내가 청중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않을수록, 나는 더욱 더 연주를 잘 한다...."

하지만 그의 실황연주 DVD를 보는 바로 지금 이 순간,

그의 청중에의 무심함과 음악에의 몰입이 감사하다.

가슴을 파고드는 눈물방울같은 그의 맑고 깊은 소리가 고맙다.

건반 바로 위에 설치되어 있는 카메라의 도움으로

연주회장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그의 손 움직임 하나하나를 볼 수 있었다.

쇼팽 연습곡 작품 10-2번.

천하의 리히터도 오른손으로만 치는 부분에

살짝쿵 왼손을 섞었구나.

하지만 그럼 뭐 하나...

그의 손가락 번호를 빠짐없이 알아버렸는데도

나는 그와 비슷하게 칠 수도 없는 걸....

보너스 트랙에 있는

젊은 시절의 숨막히던 쇼팽 연습곡 연주와 비교해보면

세월의 흔적을 인간적인 너그러움으로 남겨둔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

평생을 피아노와 함께 살면서 3589회의 독주회 일지를 작성한

1989년 74세의 피아니스트의 무대 위의 자랑스런 모습.

그를 확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