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S "전쟁포로 피아니스트" ...릴리 크라우스 2 방송원고:당신의밤과음악 08-03-29
2008-03-30 19:56:40
허원숙 조회수 2620

KBS FM 당신의 밤과 음악

허원숙의 <피아니스트 플러스>코너

2008년 03월 29일 원고....릴리 크라우스 Lili Kraus (2) “전쟁포로 피아니스트”

(b. Budapest, March 4, 1905; d. Asheville, North Carolina, Nov. 6,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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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 크라우스는 빈 음악원을 졸업하던 1925년 스무살의 나이로 빈음악원의 교수로 임명되고 또 바이올리니스트 시몬 골드베르크와 듀오 연주로 유명하게 되고, 이 둘의 연주는 완벽한 연주의 표본으로 평가됩니다. 또한 솔리스트로서도 모차르트, 베토벤, 하이든과 같은 독일어권 작곡가의 작품을 완벽하게 연주하는 피아니스트였지만 빈에서 솔리스트로 인정받는 데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했는데, 그것은 남편이 독일계 유대인이었기 때문이죠.

1934년 남편과 영국으로 이주한 후에 새롭게 피아니스트로서 출발을 하고 비로소 인정을 받게 된 릴리 크라우스는 유럽으로 시작해 일본, 호주, 남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세계를 무대로 연주여행을 시작합니다.

 

그러던 중에 인생의 대전환기를 맞게 되는데요....

1942년, 릴리 크라우스는 동남아시아로 연주여행을 하게 됩니다. 그 당시는 온 세계가 2차대전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시기였는데 릴리 크라우스가 찾아갔던 자바섬에 하필이면 그때 일본군이 쳐들어옵니다. 그리고 포로로 잡혀서 3년간 일본군의 수용소에서 옥살이를 하게 되지요.

평소에도 일반인보다 더 손을 소중하게 여기는 피아니스트가 포로로 수용소에 갇혀서 노동을 하면서 지내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상상이 가시죠?

손 자체의 힘듬보다, 아마도 이 손으로 다시 피아노를 칠 수 있을까 하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을 것 같은데요, 그런 와중에 동경에서 모차르트 협주곡 시리즈 연주회에 피아노 협주곡을 다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을 급하게 찾는 전갈이 옵니다. 그리고 이 수용소에 갇혀있는 릴리 크라우스가 바로 모차르트의 대가라는 것이 알려지게 되고, 릴리 크라우스는 수용소에 있다가 졸지에 동경으로 가서 모차르트 협주곡 전곡을 연주하게 되지요.

나 원 참... 일본은 그 당시에 온 세상을 전쟁으로 몰아넣고, 우리나라도 그렇게 힘들게 만들어놓고, 자신들은 우아하게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모셔다가 연주회나 하고...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아무튼 그 바람에 릴리 크라우스는 그 다음부터는 수용소 내에서 피아노 사용을 하가 받아 연주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네요.

그렇게 수용소 생활이 3년. 1945년에 드디어 전쟁은 끝나고 릴리 크라우스도 수용소에서 나와 세상을 향하여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그리고 첫 번 연주회를 오스트레일리아의 시드니 콘서바토리에서 개최하게 됩니다. 영국에서의 릴리의 명성은 이 곳 호주에도 알려졌고, 청중들은 릴리 크라우스가 돌아왔다고 흥분하면서 음악회장을 가득 메웠습니다.

 

음악 듣겠습니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12번 K.414 중에서 제 1악장 Allegro를 릴리 크라우스의 피아노, 피에르 몽퇴가 지휘하는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보내드립니다. 1953년 녹음입니다. (연주시간 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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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난 직후에 온 세상은 새로 시작하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시기였지요. 전쟁으로 파괴된 현장에서는 복구작업이 한창이었고, 사람들은 전에 가지고 있던 재산, 명예, 학위, 가족... 할 것 없이 모든 것을 잃고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는 시기였습니다.

릴리 크라우스에게도 이 시기는 새로 시작하는 시기였습니다. 채식주의자가 되었고요, 건강한 생활을 위해서 그동안 피웠던 담배도 끊었다고 하죠.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릴리의 연주를 목말라하던 청중들을 위해서 연주회를 시작했는데요, 시드니 콘서바토리에서 첫 연주회를 가진 후에는 자신이 쌓아온 명성을 다른 사람들을 도우는 데에 많이 썼다고 하는데요, 주로 구호 사업을 위한 연주회를 개최하는 일이었죠.

당시 릴리 크라우스는 뉴질랜드로 온 가족과 함께 이주해서 시민권을 받아 새롭게 생활을 시작했던 시기였는데, 뉴질랜드 사람들에게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서 120회가 넘는 연주회를 개최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많은 연주회를 모두 좋은 공연장에서 좋은 악기로 공연한 것은 아니었나 봐요. 릴리 크라우스의 말을 빌면, 피아노는 겉모양만 번지르르했지, 사실 방치되다시피한 악기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아직 문화적으로는 충분히 발전하지 못한 뉴질랜드의 공연장이나 악기 수준이 높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는데요, 공연하려고 연주회장에 가면 악기 사정이 열악해서, 무대 위에 놓여진 피아노가 연주하기에는 부적합한 것들이 많았고요, 다른 악기를 사용할 수 있는 기회도 없었고 해서 120회가 넘는 그 많은 연주회들을 그저 그런 악기로 계속해서 연주했다고 하네요. 자신의 악기를 가지고 공연장을 다닐 수 없는 피아니스트에게 이렇게 계속해서 열악한 악기가 주어져서 제대로 자신의 소리를 전달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사실이죠.

 

1948년.

릴리 크라우스는 다시 유럽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연주회를 시작합니다. (빈?)

예전의 릴리 크라우스를 기억하는 청중들이 모여들어 공연장을 가득 메웁니다.

연주회를 했습니다.

이제는 비로소 아주 좋은 악기로 연주했겠죠.

그런데, 연주회의 평은 나빴습니다.

“그녀는 예전의 광채를 잃었다. 섬세함도 잃었다”

도대체 왜 그럴까?....

릴리 크라우스는 생각합니다. 도대체 왜 내 연주가 나빠졌을까?

생각은 세월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수용소에 들어갔고, 거기서 거친 노동으로 손이 망가졌고, 그 상태에서 충분한 연습도 없이 연주회에 투입(!) 되었고, 전쟁이 끝났고, 곧바로 연주생활이 다시 시작되었고, 계속되는 연주회마다 악기 사정은 열악했고, 그로 말미암아 자신이 내는 진짜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거죠. 마치 지직거리는 라디오로는 방송을 제대로 들을 수 없는 것처럼, 성능이 나쁜 악기로 계속 연주하면서 망가져가는 자신의 진짜 소리를 알아채지 못하고 몇 년이라는 세월을 보내왔던 것. 그리고 다시 유럽으로 돌아와 좋은 악기에서 연주하게 되니, 그 동안 망가진 자신의 소리가 여과없이 그대로 나오게 된 것..

 

으악!

다시 연습하자!

 

음악 듣겠습니다.

1956년 모차르트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면서 녹음한 모차르트 소나타 전곡 녹음 중에서 D장조 K.311의 전곡을 릴리 크라우스의 연주로 보내드립니다.

1악장 Allegro con spirito, 2악장 Andante con espressione 3악장 Rondo (Allegro)입니다.

(연주시간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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