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S \"나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지만\"...그린베르그 2 방송원고:당신의밤과음악 08-02-09
2008-02-21 01:36:45
허원숙 조회수 4014

KBS FM 당신의 밤과 음악

허원숙의 <피아니스트 플러스>코너

2008년 02월 09일 원고....Maria Grinberg (2) “나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지만 ”

Maria Grinberg (Russian: Mария Израилевна Гринберг, Marija Israilyevna Grinberg)

(b.1908,Odessa, Russia~d. July 14, 1978, Talli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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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이어 마리아 그린베르그의 이야기입니다.

1935년 All-Union 피아니스트 콩쿠르에서 2등상을 수상하면서, 가공할만한 기교를 가졌다는 평과 함께 러시아 피아노스쿨의 대표적인 인물로 떠올랐다가, 27세에 화려한 성공의 문턱에서 히브리 학자였던 아버지와 남편의 체포, 처형에 연이어 자신도 연주자의 자격을 박탈당하고 아마튜어 무용단체의 연습피아니스트로 생계를 이어갔던 마리아 그린베르그. 그 와중에도 가끔 무대에 오르기는 했지만, 무대에서 피아노가 아닌, 오케스트라의 팀파니 연주를 하였다고 말씀드렸죠.

 

이렇게 러시아 피아노스쿨의 대표적인 인물로도 거론된 피아니스트가 27살 한창 나이에 무대에 서지 못한다는 것은 어떤 형벌보다도 더 가혹한 형벌이랄 수 있겠는데요, 시간이 흘러무대 연주 금지는 해제가 되었고요, 다시 그린베르그는 국영매니지먼트에 피아노 솔리스트로 받아들여지고, 모스크바 사람들이 많이 찾는 피아니스트가 되어서 레닌그라드, 리가, 칼린, 보로네즈(Voronezh) 트빌리시, 바쿠(Baku) 와 소련 전역의 여러 도시에서 연주회를 개최하고 Gauk 나 Abendroth 같은 지휘자들과 함께, 또는 보로딘 콰르텟, 성악가 니나 도를리아크 Nina Dorljak (스비아토슬라브의 부인) 와 함께 공연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이런 공연은 모두 국내에 한정된 것이었고, 외국 공연은 1953년 스탈린이 죽은 후에서야 비로소 가능하게 되었는데요, 그린베르그는 평생토록 총 14번의 외국 연주여행을 했는데 대부분이 소비에트 지역의 나라들이었고, 2번이 네덜란드에서 개최된 것이었죠. 연주는 성공적이었고 비평가들은 호로비츠, 루빈슈타인, 클라라 하스킬과 비교하며 그린베르그의 연주에 최고의 찬사를 아끼지 않았는데요, 정작 소련내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고 하죠. ‘그린베르그가 외국에서 이렇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라는 기사는 한 줄도 나가지 않았고요. (하긴, 국내에서 연주할 때에도, 그렇게 공연장마다 매진이 되고, 연주가 성공적이고, 청중으로부터 최고의 찬사를 들었어도, 신문에 공연평 한 줄, 기사 한 줄 나가지 않았던 사람인데, 외국연주야 국내에 있는 사람들이 알 턱이 없을테니 그렇게 무시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겠지만...)

 

1959년 51살이 된 그린베르그는 모스트바의 그네신 음악학교에서 강사직으로 강의를 하기 시작했는데요, 1970년 (61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교수직을 받았다고 하죠. 55살에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소련인민예술가의 칭호를 받을 수 있었고요. 하지만 모스크바 콘서바토리 교수직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의 심사위원직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음악 듣겠습니다.

 

마리아 그린베르그의 연주로 들으실 곡은...

Anton Arensky의 Fantasie on a themeby I.Ryabinin E 단조 op.48입니다.

Sergei Gorchakov가 지휘하는USSR State Radioinformation Symphony orchestra 와의 1947년 12월 20일의 실황입니다. (연주시간 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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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피아니스트의 정상에 올랐다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가족이 처형되고 본인에게도 무대공연금지가 내려지면서 힘든 상황 속에서도 꿋꿋히 피아니스트로서의 삶을 계속했는데요,

또다시 힘든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바로 40대말에 발병한 뇌종양으로 인한 수술이었는데, 정말 이 조그마한 여인에게서 어떻게 그런 거인의 힘이 나오는지.... 베토벤의 귀가 들리지 않게 되었을때 나오는 말 있죠? “운명의 목을 휘어잡았다”라는 말. 바로 그린베르그의 경우에도 들어맞는 말이었습니다.

 

수술 후 2-3개월이 지나지 않아 그린베르그는 하룻밤에 바흐의 F 단조, 베토벤, 라흐마니노프 3번 피아노 협주곡을 모스크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하였는데요, 물론 그 연주회는 완전매진이었고 연주는 성공적으로 마쳤지만, 리뷰도 나오지 않았고, 연주에 대해 작은 글 하나 신문에 나오지 않았다고 해요.

또한 1970년에는 그린베르그가 녹음한 베토벤의 32개의 피아노 소나타 음반이 13장의 LP로 나왔고, 이것은 러시아 피아니스트로 첫 음반이 되었는데요, 소비에트 음악신문에는 이 일에 대해서 단 한 글자도 나오지 않았다고 하죠. 단지 마리아 그린베르그가 숨지기 석 달 전인 1978년 미평가 Yudenich (유데니치) 가 소비에트 음악잡지 (Sovetskaya Muzyka magazine)에서 이 음반을 “한 예술인의 진실한 발”이라고 평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이니, 마리아 그린베르그의 실황연주가 TV나 동영상으로 제작되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요....

 

마리아그린베르그는 1978년 7월 14일 70세 생일을 19주 앞두고 Tallinn에서 사망했는데, 딸 니카 (Nika) 가 장례를 치르러 왔지만, 장의사는 고인이 누군지를 알고 장례를 거부했다고 하죠. 또 그네신 음악학교의 학장이면서 합창지휘자인 Vladimir Minin은 1년전 그린베르그를 교수직에서 강제로 사임하게 했던 사람인데, 그린베르그가 몸 담고 있었던 그네신음대에서의 추모식을 완강히 거부했고요.

단지, 문화부 차관 Kukharsky의 노력의 도움으로, 마리아 그린베르그는 그나마 순조롭게 저세상으로 떠날 수 있었다는데요.....

 

이렇게 슬픈 삶과 슬픈 죽음으로 점철된 그린베르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머감각도 있었다는데.... 마리아 그린베르그의 풀네임은 Marija Israilyevna Grinberg였는데요, 이스라일례브나의 뜻은 이스라엘의 딸이라는 말인데요, 1967년 소련과 이스라엘의 적대감이 극에 달했을 때, 소련은 항상 이스라엘의 침략국이라고 불렸다고 해요. 그래서 마리아 그린베르그는 항상 자기 아름을 소개할 때 Maria Aggressorovna 라고 했다죠. 마리아 침략국의 딸....^^

이렇게 모든 것을 다 잃고 철저히 소외당하고 무시당한, 지워진 피아니스트로서의 삶을 살은 마리아 그린베르그.

한 번은 친구에게 아주 처절하게 말했다고 하죠.

“나,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지만, 결국은 다 갖게 될 거야. 내가 죽은 다음...”

 

음악 듣겠습니다. 마리아 그린베르그의 연주회 실황으로, 리스트가 편곡한 슈베르트의 가곡을 보내드립니다.

제1곡 Der Wanderer 방랑자

제2곡 Liebesbotschaft 사랑의 전령

제3곡 Erstarrung 얼어붙음

1976년 5월 2일 모스크바 음악원의 대강당에서 있었던 연주회 실황입니다.

(연주시간 6:26+3:17+4:07= 약 1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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