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S \"지워진 존재\"...마리아 그린베르그 1 방송원고:당신의밤과음악 08-02-02
2008-02-03 07:46:53
허원숙 조회수 2378

KBS FM 당신의 밤과 음악

허원숙의 <피아니스트 플러스>코너

2008년 02월 02일 원고....Maria Grinberg (1) “지워진 존재”

Maria Grinberg (Russian: Mария Израилевна Гринберг, Marija Israilyevna Grinberg)

(b.1908,Odessa, Russia~d. July 14, 1978, Talli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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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 콘서트를 보면 마지막 코너 <까다로운 변선생>에 이런 등장인물이 있죠.

교실 안에 엄연히 존재하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런 투명인간 같은 존재.

왕따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심한 왕따. 있지만 없는 사람......

오늘 소개하려는 피아니스트는 바로 그런 투명인간 같은 존재였던 분입니다.

 

1930-40년대의 러시아 라고 하면 정치적인 여러 가지 사건들을 떠 올릴 수 있겠지만, 20세기를 대표하는 세계최고의 피아니스트들이 정말 많이 나온 시기로 기억되는데요. 겐리크 네이가우스가 말했죠,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가 최고 중의 최고 피아니스트이다” 라고요. 그런데 이 분의 연주를 들으면 네이가우스의 판단이 틀릴 수도 있구나 하고 생각하시게 될 겁니다.

 

이분은요, 피아니스트 마리아 유디나와 함께 20세기 소련을 대표하는 여성 피아니스트인데요, 27세에 화려한 성공의 문턱에서 남편과 부친의 체포와 처형, 정치적 박해로 험난한 삶을 감내하면서 살아야만 했던 피아니스트입니다.

이 분은 소련 밖에서는 열정적인 찬사를 받았지만 소련 내에서는 실력을 외면당했고, 이 분이 돌아가셨을 때에는 장의사마저 구할 수 없었고, 그네신 음대에서도 이 분에 대한 추모를 거부했던, 끝없는 고난으로 이어진 불행한 삶을 살았던 피아니스트입니다.

 

어떤 선입견도 버리시고 음악을 먼저 들려드리겠습니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제18번 E flat 장조, 작품 31-3 중에서 제2,3,4 악장입니다.

누가 연주하냐구요?

일단 들어보시라니깐요! (연주시간 4:42+4:24+4:24=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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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하죠?

저는 누워서 이분 음반을 듣다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이 분의 이름은 마리아 그린베르그입니다. (이 연주는 1966년 58세의 녹음입니다.)

모르신다구요? 괜찮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분을 모릅니다.

 

마리아 그린베르그는 아마도 20세기를 대표하는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 중의 한 명이 아니었나 생각이 드는데요, 굉장한 재능을 타고 났지만 예술적인 커리어를 쌓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한 피아니스트였습니다. 하지만 그 원인은 본인 능력의 부족이 아니라 소련 정부로부터 정치적인 박해를 받아서 그렇게 된 것이었죠. 따라서 서방세계에는 거의 그분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게 되었고요.

 

마리아 그린베르그는 1908년 우크라이나의 오데사에서 지식인의 가정에 태어났는데요, 그녀의 아버지는 히브리 학자였고, 어머니는 피아노 레슨 선생님이었는데요, 1917년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는 유복한 가정이었는데, 공산당의 세력이 커지자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고 하죠. 처음에 피아노는 레슨을 하시는 어머니한테 배우기 시작해서 곧바로 오데사 음악원에 들어가서 오데사에서 가장 훌륭하시다는 David Aisberg 선생님의 문하에서 수업을 받았고요, 실내악 연주도 많이 했는데 예를 들면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같은 바이올리니스와 함께 연주도 하고 그랬죠. 가정 형편은 말이 아니게 힘든 상황이었다는데요, 거의 굶다시피 살았나봐요. 하지만 그렇게 워낙 재능이 뛰어나다보니 후원자의 눈에 띄게 되었고, 그 후원자의 도움으로 펠릭스 블루멘펠트 (호로비츠의 선생님이면서 외삼촌, 아시죠?) 에게 가끔씩 레슨을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블루멘펠트 선생님이 돌아가시고는 모스크바 콘서바토리의 Konstantin Igumnov에게 2년동안 가르침을 받았고요.

 

마리아 그린베르그가 피아니스트로서의 인정을 받게 된 것은 1935년 All-Union 피아니스트 콩쿠르에서 2등상을 수상하게 되면서인데요, 가공할만한 기교를 가졌다는 평과 함께 러시아 피아노스쿨의 대표적인 인물로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1937년에 (28살) 히브리학자였던 유대인 아버지와 또 그린베르그의 남편이 체포되고요, 인민의 적이라는 이름 하에 처형되면서 그린베르그의 운명은 바뀌어갔는데요, 자신이 속해있던 국가에 의해 경영되는 국영매니지먼트사에서 그린베르그의 이름을 지워버린 일이 일어났죠. 하루아침에 피아니스트로서의 길을 잃어버린 그린베르그는 생계를 위해서 아마튜어 무용단체에서 연습반주자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가끔씩 일반 무대에서 연주도 했다는데요, 그게 참, 피아니스트로서가 아니라 팀파니 주자로 무대에 올랐다고 하네요.

 

그러면, 다시 마리아 그린베르그의 연주를 보내드리겠는데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제7번 D 장조, 작품 10-3 중에서 제1악장 Presto, 제2악장 Largo e mesto. 1965년 녹음으로 보내드립니다. (연주시간 7:03+8:56= 1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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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속에 처절한 슬픔을 담고 산 피아니스트.

다음 시간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