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S \"피아노의 신\"...블라디미르 소프로니츠키 1 방송원고:당신의밤과음악
2007-11-28 12:54:06
허원숙 조회수 3442

KBS FM 당신의 밤과 음악

허원숙의 <피아니스트 플러스>코너

2007년 07월 07일 원고....블라디미르 소프로니츠키 (1)  “피아노의 신”

1901.5.8 (러시아 구력 4.25)-196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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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에 많은 천재 피아니스트들을 소개해 드렸는데요, 오늘은 천재를 넘어서 피아노의 신이라는 찬사를 받은 피아니스트의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

러시아의 피아니스트라면 골덴바이저, 네이가우스의 세대와 그 후의 에밀 길렐스,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 세대가 있는데 그 사이를 잇는 중간세대에 속한 피아니스트입니다.

리히터와 길렐스는 이 사람을 그들의 master, 참된 스승이라고 추앙했고요, 리히터는 특히나 이 분을 신(神)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

바로 블라디미르 소프로니츠키인데요.

소프로니츠키라면 우선, 스크리아빈의 최고의 해석가로 알려져있습니다. 물론 호로비츠도 스크리아빈의 연주가 탁월하지만, 특히나 소프로니츠키에게는 호로비츠에게서는 찾기 힘든 어둡고 부서질 것 같은 섬세한 우수가 담겨있지요.

그렇게 되기까지, 소프로니츠키는 어린 시절부터 스크리아빈의 추종자였었고, 1920년에는 스크리아빈의 서거 5주년 기념으로 스크리아빈의 곡만으로 그의 첫 독주회를 꾸밀 만큼 스크리아빈을 사랑한 피아니스트였는데, 또한 스크리아빈의 맏딸 엘레나 스크리아비나와 결혼을 해서 명실상부한 스크리아빈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장인의 사위 사랑이 대단했겠구나 하고 생각하시겠지만, 스크리아빈은 소프로니츠키가 14살이었을 때 이미 저 제상으로 떠났으니까 장인과 사위의 직접적인 대면은 없었던 거죠.

소프로니츠키라면 아주 낯선 피아니스트로 여겨지는데, 그 이유는 소프로니츠키가 활동했던 시기가 러시아에서는 가장 탄압이 심했던 스탈린시대였기 때문이었죠. 그런 시대에 연주가로서 활동을 하다보니 거의 러시아 안에만 갇혀서 활동을 해서 서방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상태로 생애를 마쳤는데, 이 분이 다시 조명을 받기 시작한 것은 그의 훌륭한 연주를 담은 실황 음반이 서방으로 전해지면서 시작되어서 비로소 사후에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음악을 듣겠습니다.

블라디미르 소프로니츠키의 1960년도 모스크바 음악원 소강당에서 있었던 실황 음반에서 보내드립니다.

쇼팽의 녹턴 F 샤프 장조 작품 15-2번과 F 장조 작품 15-1번입니다.

(연주시간 3:20+4:19= 7분 39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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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로니츠키는 1901년 5월 8일 러시아의 상트 페쩨르부르그에서 태어났는데요, 아버지는 물리학 선생님이셨고, 어머니는 유명한 초상화가인 블라디미르 보로비코프스키의 손녀였다고 합니다. 러시아에서 태어났는데 2살 때 가족이 바르샤바로 이주하는 바람에 바르샤바의 유명한 피아노 교사인 레베데바-게체비치에게서 최초의 피아노 수업을 받았습니다.

어린 소프로니츠키의 재능은 당시 상트 페쩨르부르그 음악원의 교장이면서 작곡가였던 글라주노프의 눈에 띄어서 글라주노프는 소프로니츠키에게 아주 좋은 선생님을 소개했는데, 그 분이 바로 당시 폴란드의 명 피아니스트이자 쇼팽의 해석가로 유명한 알렉산더 미카일로프스키이죠. 9살 때부터 미카일로프스키에게 피아노 수업을 받은 소프로니츠키가 후에 쇼팽의 탁월한 해석가가 된 것은 두말 할 나위가 없겠죠?

하지만 1913년에 가족들이 다시 상트 페쩨르부르그로 이주해서 소프로니츠키는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중의 2년간을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셰드린에게 배운 후에 1916년 상트 페쩨르부르그 음악원에서 명교사 니콜라예프 문하에서 수업을 마치게 됩니다. 당시의 니콜라예프의 클래스에는 얼마 전에 소개해 드린 마리아 유디나도 있었고요, 또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도 같이 있었는데, 선생님의 소프로니츠키에 대한 사랑이 각별해서 쇼스타코비치의 증언이라는 책에 보면, 질투나는 장면도 있었다고 해요.

예를 들어서 마리아 유디나와 같은 때 졸업 연주회를 했는데, 둘이 다 똑같이 리스트의 소나타 B 단조를 연주했대요. 소프로니츠키가 등장할 때가 되었는데 니콜라예프 선생님이 무대에 등장해서는, 오늘 소프로니츠키가 몸이 안 좋아서 이해해 달라고 하면서 연주회가 시작되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너무 잘했다는 거예요. 섭섭한 쇼스타코비치는 “나는 지난 번에 목에 기부스하고도 연주했는데, 이렇게 하는 법이 어디 있냐”면서, 아프면 연주를 하지 말던지, 아니면 연주할 거면 아프다 말을 하지 말든지, 동정점수를 받으려는 거냐 뭐냐... 그런 식으로 푸념을 늘어놓는 구절이 있어요. 어쨌든 니콜라예프는 이 애제자 소프로니츠키를 블라디미르의 애칭인 보보쉬카라고 부르면서 각별히 아껴주었다고 하죠.

아무튼 1921년 마리아 유디나와 공동으로 안톤 루빈슈타인 상을 수상하며 음악원을 졸업하고는 곧 연주 활동을 시작했는데, 연주 활동을 시작하자마자 인기가 거침없이 폭발해서 이미 모스크바에서 널리 알려진 피아니스트가 되었다고 합니다.

소프로니츠키의 스크리아빈 연주는 비록 스크리아빈에게는 직접적인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1922년 스크리아빈 소나타 3번을 연주하는 것을 본 스크리아빈의 미망인으로부터 최고의 해석이라는 찬사와 인정을 받음으로 더 빛을 발했는데요, 그 이후에 소프로니츠키는 러시아 전역을 돌면서 정열적인 연주회를 개최했고, 그 이후로는 1928년에 잠시 폴란드에 갔다가 파리에서 약 2년간 머무르면서 많은 연주회를 열어 대성공을 거두고, 글라주노프와 다시 재회하고 라흐마니노프, 샬리아핀 같은 거장의 연주를 듣고 감명을 받고, 알프레드 코르토나 겐리크 네이가우스, 니콜라이 메트너,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같은 작곡가들과 깊은 교분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는데 그 이후로는 러시아에만 머물면서 평생을 러시아 안에서만 활동하는 피아니스트가 되었지요. 사실 요즘은 인터넷이나 음반 산업이 발달해서 좀 덜 하긴 하지만, 콘서트 피아니스트라는 직업은 모바일, 기동성이 생명인데요 이렇게 세계적인 인물이 한 나라, 그것도 폐쇄적인 나라에 갇혀서 평생을 지냈다는 것은 엄청난 손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음악 듣겠습니다.

로베르트 슈만의 피아노 소나타 제1번 F 샤프 단조 op.11 중에서 제4악장 피날레, Allegro un poco maestoso입니다. 블라디미르 소프로니츠키의 1960년도 연주실황에서 보내드립니다. (연주시간 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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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