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S \"한 알의 씨앗이 땅에 떨어져\"...겐리흐 네이가우스 4 방송원고:당신의밤과음악 07-02-10
2007-11-28 10:58:20
허원숙 조회수 2716

KBS FM 당신의 밤과 음악

허원숙의 <생활을 노래함>코너

2007년 02월 10일 원고.... 겐리흐 네이가우스  (4) “한 알의 씨앗이 땅에 떨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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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빈에서 고도프스키와의 마이스터슐레를 마치자마자 유럽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네이가우스는 빈을 떠나 러시아로 되돌아갑니다. 이 때부터 네이가우스는 학교에 적을 두고 교직과 피아니스트라는 두 가지 직업을 병행하게 되는데요, 우선 그루지아의 트빌리시 음악원에서 2년, 키에프 음악원에서 3년간 교직에 몸담으면서 피아니스트로서 솔로 리사이틀을 성공적으로 개최해서 젊은 음악팬들 사이에 특별한 우상으로 사랑을 받게 되었고요, 그 후 1922년에는 모스크바음악원의 교수로 임명되면서 본격적으로 수많은 훌륭한 제자들을 육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네이가우스 뿐만 아니라, 네이가우스의 외삼촌이면서 네이가우스의 음악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펠릭스 블루멘펠트도 같은 때에 교수로 임용되었답니다. 네이가우스는 이 후 1935년부터 2년간 이 학교의 교장을 지냈고 이후 죽을 때까지 40여년간 모스크바 음악원에 봉직하였죠.

 


음악 스승으로서의 네이가우스의 철학이라면...

음악에 의해서 영혼 깊숙이 감동받는 사람, 악기를 다룰 줄 알고, 정열을 갖고 음악을 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대가의 기술을 얻을 수 있으며, 작품의 예술적 이미지를 재창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진정한 연주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고요.

 


네이가우스가 경멸하는 선생님의 모습이 있었는데,

1. 제아무리 유명한 선생이라 할지라도, “나는 음악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아니다. 내가 가르치는 것은 피아노 연주이다”라고 말하는 사람.

2. 이것은 아주 정직하고 예민한 선생님들의 모습인데, 학생에게 어떤 곡을 가르치면서 그 곡을 훈련의 교재로만 사용하는 사람. 네이가우스 왈, 이런 선생은 학생을 작곡가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려 하지 않고, 작곡가를 학생의 수준으로 맞추려고 하는 사람.

3.스스로 피아니스트가 아니면서 학생을 가르치려드는, 무대에서의 실전의 경험이 없이 교실 안에서만 설명하려드는 선생.

 


그런 네이가우스가 음악을 대하는 자세로 항상 예로 드는 말이 있었는데요, 그것은 톨스토이가 한 말인데, “예술가는 다음의 세 가지 자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첫째: 진지함, 둘째: 진지함, 그리고 셋째: 진지함”이라는 말입니다. 그처럼 네이가우스는 학생을 대할 때나 음악을 대할 때나 진지함으로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삶을 살았죠.

 


또한 음악을 대하는 연주가의 자세에 대해 언급한 내용을 보면요, “작곡가가 지켜야 할 윤리는 연주자가 지켜야 할 윤리와 완전히 다르다. 연주자들은 작곡가들이 가질 수 없는 객관성이나 공정함의 의미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공정함이라는 것은 어떠한 사랑이나 미움의 감정보다도 한층 고상하고 열정적인 느낌이다. 그것은 아마도 연주자에게만 유리한 점이 될 뿐만 아니라 아주 커다란 재능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했죠.

 


음악 듣겠습니다.

네이가우스의 연주로 감상하실 곡은,

라흐마니노프의 전주곡 op.23-1 F# 단조와 op.23-4 D 장조입니다. 1946년 녹음입니다.

(3:21+4:11= 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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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가우스는 고도프스키와의 공부를 마치자마자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서 러시아로 돌아가서 가르치는 일과 콘서트 피아니스트의 일을 병행하였는데요, 이것은 진정한 콘서트 피아니스트가 선택하기에는 너무나도 부적합하고 어려운 길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슬픔과 좌절 속에서 그 길을 계속하여 걸어갔다고 하는데, 바로 이 점이 네이가우스가 얼마나 훌륭한 음악가인가 하는 것을 잘 나타내는 말이죠. 본인 자신이 훌륭한 연주가일 수 있는 사람인데, 훌륭한 연주자를 길러내는 일에 몰두하며 자신은 뒷줄로 물러날 줄 알았던 사람. 그렇게 해서 수많은 훌륭한 제자들을 길러내고 자신은 피아니스트라는 이름보다는 선생님의 이름으로 기억되었던 사람.

네이가우스는 워낙 가진 손 자체가 작고 살이 없고 얇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굉장한 비르투오조 작품들을 훌륭히 연주했었지요. 하지만, 1941-42년의 투옥생활, 1942-44년의 유배생활로 인해  몸도 많이 아팠었고, 또 옥중생활의 후유증으로 오른손이 약간 마비상태로 되었습니다. 네이가우스의 전성기는 1920-30년대였다는데 그 때의 연주는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이 없고, 1940년대 이후의 손이 많이 아픈 상태에서 진행된 연주회 실황이 있습니다. 러시아의 많은 예술가를 배출하고 또 자신이 훌륭한 예술가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1956년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았고요, 1964년 사망할 때까지 교육자로서 피아니스트로서 많은 러시아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지요.

네이가우스는 인간적으로나 예술가적으로나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처럼 대단히 박학다식한 인물이었어요. 파스테르나크와는 절친한 사이였고요. 네이가우스는, 자신의 삶을 통해서, 사람이 재능을 창출할 수는 없어도 있는 재능만으로도 문화를 창달하고 그것을 번성하게 할 수는 있다는 신념을 실증해 보인 사람이었는데, 이 분의 음악 교육방식은 다른 선생들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이었다는데요, 내가 어떻게 연주할 것인가를 생각하지 말고 무엇을 연주할 것인가를 생각하라는 가르침을 주었고요, 음악적 지식, 시, 문학, 예술, 개인적 경험들, 예술적인 상상력 이런 모든 것들을 표출해내도록 가르침을 주었다고 하는데, 그런 그의 가르침에 동참하고자 그의 매스터 클래스에는 항상 음악 중에서도 다른 전공을 하는 학생들까지도 하루 종일 그의 수업을 청강하였다고 하죠.

네이가우스의 연주자로서의 매력, 그의 뛰어난 음악적 분출, 예술을 사랑하는 천재적인 재능, 그리고 그의 개인적인 성품들은 재능 있는 젊은 사람들에게 네이가우스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게 했고요, 네이가우스와 친분을 나눈 사람은 그의 예술적인 개성에 큰 영향 받아서  예술에 특별한 책임감을 느끼게 되었다고 해요.

네이가우스는 1964년 10월 10일, 위장 혈전증으로 사망했는데요, 그 때 마침 루빈슈타인이 모스크바에서 연주여행 중이었어요. 루빈슈타인과 네이가우스는 베를린의 바르트 교수 밑에서 함께 수업을 했던 클래스매이트였는데, 나이도 1살 차이였고 남다른 친분을 나누었는데, 루빈슈타인은 네이가우스가 투병 중이라는 말을 듣고 자신의 연주 당일 오전 중에 마지막으로 네이가우스의 병문안을 하였다고 하죠.

네이가우스의 장례식은 모스크바 음악원의 대강당에서 이루어졌는데, 러시아의 전역에서 네이가우스의 제자들이 모두 장례식에 참석하려고 모스크바 음악원에 왔는데 너무 많은 조문객들 때문에 그 날 강당 안에 미처 못 들어간 사람만도 수백 명이었다고 해요. 그 사람들은 장례식 내내 밖에 서서 애도를 했고, 이 장례식의 안과 밖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 수천 명에 이르는 이 모든 사람들이 장례식이 끝난 후 행렬에 참여해서 입관하는 곳까지 가서는 해가 지도록 오래도록 묘지를 떠날 줄 몰랐다고 해요. 결국은 묘지 경비원이, 날이 어두워졌는데 제발 나가달라고 해서 그 곳을 떠났다고 하죠.

 


음악 듣겠습니다.

네이가우스의 연주로 쇼팽의 소나타 제2번 중에서 제3악장 장송행진곡과 제4악장을 감상하시겠습니다. 1949년도 3월 5일 모스크바 음악원 연주 실황입니다. (연주시간 7:21 + 1:31 = 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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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가우스는 1964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루지아에서는 네이가우스를 추모하는 페스티발이 엘리소 비르살라제에 의해 매년 개최되고 있고요, 스위스에서는 네이가우스 협회가 있습니다. 인터넷으로 www.heinrichneuhaus.org 를 치시면요, 네이가우스의 제자들이 주축이 되어서 만든 겐리흐 네이가우스 협회가 나오고 스승을 기리는 제자들의 업적과 활동상황이 나옵니다. 참고가 되신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