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S \"쉿, 아버지께는 비밀이에요\"...겐리흐 네이가우스 2 방송원고:당신의밤과음악 07-01-27
2007-11-28 10:57:32
허원숙 조회수 3194

KBS FM 당신의 밤과 음악

허원숙의 <생활을 노래함>코너

2007년 01월 27일 원고.... 겐리흐 네이가우스  (2) “쉿, 아버지께는 비밀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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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학교를 운영하는 피아니스트 부모님 밑에서 오히려 독학으로 피아노를 공부해야 했던 네이가우스.

네이가우스가 쓴 책 Die Kunst des Klavierspiels (The Art of Piano Playing) 에 보면 네이가우스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한 구절 소개해 드릴께요.

 


“....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음악으로 인한 나쁜 영향을 받았다. 어머니와 아버지로부터 음악의 세균에 감염되었다. 나의 부모님은 엘리자베트그라트에서 피아노를 가르치시는 음악선생님이셨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그러니까 내가 기억하지 못할 정도의 어릴 때부터 음악을 들었다. 레슨을 하시는 부모님 덕택에 나는 믿을 수 없을 만큼의 나쁜 음악을 들었다. 왜냐면 나의 부모님께 음악을 배우는 학생의 90퍼센트는 그저 그런, 음악적 재능이 전혀 없는 학생들이었으니까. 다른 분야도 이런 일은 마찬가지겠지만... 따라서 나는 아주 높은 수준의 음악은 거의 들어보지 못한 상태에서 자랐고 나의 능력을 계발시켜줄 수 있는 영양가 높은 음악환경은 거의 접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내게 일어난 음악적인 사건은 우리 가족 안에서 일어났는데, 그것은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온 나의 외삼촌인 펠릭스 블루멘펠트의 방문이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인데도 나는 밤늦도록 계속되는 외삼촌의 연주가 끝날 때까지 잠도 안자고 삼촌의 연주를 들었다. 사실 내 나이라면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하는데, 외삼촌이 우리 집에 머무는 동안은 늦게까지 깨어있는 것이 허락되었으니까. 외삼촌은 피아노 작품을 아주 많이 연주했는데, 특히 쇼팽과 슈만, 리스트, 그리고 외삼촌이 작곡한 곡들, 또 글라주노프, 발라키레프, 리아도프 등을 연주했고, 특히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바그너의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트리스탄과 이졸데>, <지그프리드> 였는데 외삼촌은 그 오페라들을 밤새 처음부터 끝까지 모조리 연주했었다.

그 덕분에 <스페이드의 여왕>, <보리스 고두노프>, 그리고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오페라를 난생처음 들을 수 있었다. 물론 나의 누이와 나도 외삼촌에게 연주를 들려주었고, 외삼촌이 해주는 소중한 말들을 들을 수 있었다. 잊을 수 없는 정말 행복한 날들이었다. 마치 즐거운 공휴일처럼, 아침부터 저녁까지 행복과 기쁨이 우리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러한 일들은 3,4년에 한 번 정도 있는 일이며 외삼촌이 우리 집에 머무는 시간은 대략 2-3주 정도였다. 이러한 시간들이 지나가면 삶은 다시 일상적인 생활로 되돌아가고, 우리들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하루를 채우며 길을 찾아가야만 했다.

내가 여덟 살인가 아홉 살쯤 되었을 때, 피아노로 즉흥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금씩, 나중에는 더 많이 길게, 아주 열정적으로 즉흥연주를 했다. 그렇게 피아노를 칠 때면 나는 완전히 신들린 사람처럼 되었는데, 그 상태가 되면 나는 나의 내면의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어떤 때에는 완전히 하루 종일 그렇게 피아노를 치곤 했는데, 나는 이런 저런 이유로 이 사실을 숨기고 지냈다. (특히 아버지한테). 그리고는 부모님이 밖에 나가시고 안 계실 때에만 즉흥연주를 했었다....”

 


어때요?

평범한 음악 교사에게서 태어난 꼬마 천재음악가가 나름대로 자신의 환경에 적응하면서 천재임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눈물겹죠.

그러니 이런 반짝이는 아들을 아버지가 방치하고 놔두어서 독학 아닌 독학을 하게 했다는 것이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게, 네이가우스가 나중에 말 한 것을 보면, 아버지의 음악적인 소양은 뛰어났지만, 피아노 실력은 약간 부족한 정도였다고 해요. 본인이 그러니 아들에는 테크닉이 뛰어나야 음악의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고 가르쳤고요.

 


음악 듣겠습니다.

chopin 의 piano sonata no.2 중에서 1악장 Grave-Doppio movimento, 2악장 Scherzo입니다. 겐리흐 네이가우스의 1949년 (61세) 모스크바음악원 연주홀에서 있었던 실황입니다. (연주시간 11:28)

DENON COCO-80271-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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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네이가우스의 어린 시절은 그야말로 내면에서 샘솟는 음악으로 채워진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예를 들면, 길을 걸어갈 때에도 머릿속에 악상이 떠오르는데 장엄한 ‘아다지오 adagio ’로 선율이 떠오르면 발걸음도 거기에 맞추어서 천천히 무게 있는 걸음으로 걷다가 머릿속의 선율이 ‘알레그로 콘 푸오코 allegro con fuoco’ 또는 ‘프레스토 푸리오조 presto furioso'로 흘러가기 시작하면 걸음이 자기도 모르게 빨라져서는, 골목길을 빠른 Galopp 의 속도로 종횡무진 뛰어가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골목 안에 있던 개가 마치 따라올 것처럼 미친 듯이 짖어대곤 했다죠... 그 때가 정말 행복했던 시절이었다고 하는데...

피아노는 12살이 되면서부터는 정말로 혼자서 공부했대요. 부모님이 아무리 피아노 선생님이라고 해도 아침부터 밤중까지 제자들 가르치느라 똑똑한 자기 아들 돌봐줄 시간이 전혀 나지 않았다고 해요. 그리고 제 생각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을 것 같은 이유는, 안 가르쳐줘도 잘 하니까. 악보도 잘 보고 연주도 잘 하고 이미 엘리자베트그라트에서는 이미 너무 천재 연주가였으니까.

그런데 네이가우스는 그런 자신의 상황을 되돌아보면서 이런 말을 해요.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너무 이른 시기에 혼자 독립적으로 음악을 하다 보니, 바보 같은 실수를 범할 때가 많았다. 만일 내가 그 어린 시기에 3-4년 정도 현명한 선생님께 배웠더라면 그런 어리석은 실수들은 피할 수 있었을텐데...”라고요.

그러니 어린 시절 그렇게 천재였던 네이가우스도 사실 진정한 가르침에 너무나 목말라 있었던 거죠. 그런 목마름은 3,4년마다 겨우 2-3주 정도씩 네이가우스의 집을 방문하며 네이가우스의 마음에 음악의 혼과 정열을 불어넣어준 외삼촌 펠릭스 블루멘펠트로 조금씩이나마 갈증을 해소할 수 있었고요, (하지만 그 가르침이 얼마나 생생하며 살아있는 가르침인지요!)

그리고 그 외삼촌의 조언으로 베를린 유학도 갈 수 있었고요.

 


겐리흐 네이가우스는 두 명의 스승에게서 가르침을 받는데요, 한 분은 레오폴드 고도프스키이고 또 한 분은 카를 하인리히 바르트입니다. 바르트라고 하면 기억나는 사람 없으신가요? 루빈슈타인이 피아노 배울 돈이 없다고 하니까, 유태인 은행가 3명을 후원가로 소개해 주어서 그야말로 돈 걱정 없이 음악공부에 열중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던 선생님... 바로 그 선생님에게 네이가우스도 배웠지요. 네이가우스와 루빈슈타인과의 인연은 이 때 만들어져서, 네이가우스가 죽는 날까지 지속되지요. (그 얘기는 다음에...)

그리고 또 한 분의 스승, 고도프스키라고 하면 비르투오조 테크닉의 대가이면서 쇼팽의 연습곡을 가지고 기교적으로 더욱 난해하게 만든 53개의 연습곡같은 작품을 남긴 작곡가이면서 피아니스트이죠. 네이가우스의 자유롭고 열린 음악에 대한 생각들은 이 분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요.


음악 듣겠습니다.

Schumann 의 Fantasie op.17 중에서 제1악장입니다. 겐리흐 네이가우스의 1958년 4월 23일 모스크바 음악원 연주홀에서 있었던 70세 기념 연주회 녹음입니다. (연주시간 12:03)

DENON COCO-80271-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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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