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S \"행운의 숫자\"....미켈란젤리 1 방송원고:당신의밤과음악 06-03-18
2007-11-27 18:54:57
허원숙 조회수 2761

KBS FM 당신의 밤과 음악

허원숙의 <생활을 노래함>코너

2006년 03월 18일 원고.... 아르투르 베네데티 미켈란젤리 (1)행운의 숫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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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14살에 베르디 음악원을 졸업하고, 의학공부를 하다가 19세에 제네바 국제 콩쿨에 우승하면서 피아니스트의 길을 걸어간 비밀에 싸인 한 사람의 이야기를 해 볼까합니다.

누군지 아시겠어요?

바로 아르투르 베네데티 미켈란젤리입니다.

 


미켈란젤리란 이름을 들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일은, 연주회 취소를 정말 많이 한 사람일 겁니다. 그렇다면 성격이 이상한 사람일까요? 책임감이 없는 사람일까요?

그 대답은, ‘완벽주의자’입니다.

그 다음으로 미켈란젤리의 이름을 들으면 자신의 피아노를 항상 연주회장에 가지고 다니는 피아니스트이죠.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 대답도 ‘완벽주의자’입니다.

 


미켈란젤리는 1920년에 브레시아에서 태어났죠.

아버지는 법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변호사로도 일을 한 사람이었는데요, 음악에 관심도 많았고 또 본인도 작곡 전공도 같이 해서, 음악사, 음악이론, 화성학 같은 수업을 가르쳤다고 해요. 그런 아버지한테 아들 미켈란젤리는 3살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구요, 4살에 브레시아의 음악학교에 들어가서 9살때에는 밀라노의 베르디 음악원에 들어가 정식으로 피아노를 배웠구요, 1934년(14살)에는 베르디 음악원을 졸업했다고 해요.

14살에 음악원을 졸업했다는 사실이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데요, 11살 때 미켈란젤리가 가르친 학생의 나이가 18살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이 제자는 아버지 미켈란젤리의 학생이었는데요, 졸업 시험을 보아야 하는데 베토벤의 비창 소나타를 어떻게 쳐야 할 지 조언을 구하니까, 미켈란젤리의 아버지가 “내 아들한테 한 번 쳐 달라고 해라”고 해서 이 18살 학생은 미켈란젤리에게 연주를 부탁했고, 연주를 들은 후에는, “절 가르쳐 주시옵소서” 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미켈란젤리에게 레슨을 받았다고 하죠.

아무튼, 재주 많은 미켈란젤리는 피아노 뿐 아니라, 오르간, 바이올린, 작곡 등 음악에 관한 공부를 두루두루 했구요, 그것도 모자라서 졸업 후에는 의학에 심취해서 한동안 의학으로 진로를 돌리기도 했는데요, 19살에 제네바 국제 콩쿨에서 1등을 수상하고서 본격적인 피아니스트의 삶을 살았죠.

 


오늘은 자주 듣지 못하는 음반을 소개해 드리려고 하는데요, 1939년 7월 8일 제네바 콩쿨 우승한 장면이 담겨있는 음반이에요.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했는데요, 이 연주를 듣고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알프레드 코르토가 “리스트가 다시 태어난 것 같다”라고 말했다고 해요. 궁금하시죠? 어떻게 치는지?

그럼, 먼저 이 콩쿨 결승장면을 들으시겠는데요, 리스트 협주곡의 첫 부분이 어찌된 영문인지 녹음이 안 됐다고 해요. 그래서 약간 잘린 상태로 음악이 시작되는 것을 양해하시고 들으세요.

지휘에는 에르네스트 앙세르메, 오케스트라는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

1939년 7월 8일 제1회 제네바 국제 콩쿨 결선 실황 녹음입니다. (연주시간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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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때요?

정말 리스트가 다시 탄생한 것 같죠? 환호성도 대단하죠?

 


1938년에 미켈란젤리는 제2회 브뤼셀 음악콩쿠르에 참가했어요. 이 콩쿨은 지금의 퀸 엘리자베스 콩쿨의 전신인데요, 제1회 때에는 벨기에의 바이올리니스트 외젠 이자이를 기념하는 뜻에서 바이올린 부문으로 개최했구요, 1등상은 다비드 오이스트라흐가 받았어요.

그 다음 번 제2회 콩쿠르는 피아니스트를 뽑는 콩쿠르였는데요, 미켈란젤리는 7등, 1등은 에밀 길렐스.

당시에 루빈슈타인이 미켈란젤리에게 점수를 박하게 주었구요, 이태리 심사위원들도 거의 점수를 주지 않았다고 해요.

그런데 이 브뤼셀 콩쿠르의 후원자인 벨기에의 여왕 엘리자베스는 아마추어 바이올리니스트였는데요, 미켈란젤리의 연주를 듣고, 또 나중에 같이 연주하면서 미켈란젤리에게 행운을 상징하는 7이라는 숫자가 새겨진 커프스 버튼을 선물로 주었다고 하죠. 7등이지만, 그래도 행운의 숫자니 간직하라는 뜻이었나봐요.

1939년이 되어서 제3회 브뤼셀 콩쿠르가 개최되어야 하는데, 그 때 유럽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었어요. 히틀러는 폴란드를 공격했구요, 브뤼셀에서는 콩쿠르를 개최할 수 없게 되었구요, 중립국인 스위스가 대신 우리가 젊은 음악가들을 위한 콩쿠르를 개최하겠다고 나섰지요.

그 콩쿠르가 바로 제네바 국제 콩쿠르인데요, 거기에 미켈란젤리가 참가하게 된 거죠.

당시에는 피아노 콩쿠르에도 남자부, 여자부 이렇게 따로 나누어서 콩쿠르를 실시했고, 심사위원들은 검정색 두꺼운 커튼 뒤에서 심사를 했다고 해요. 연주자를 볼 수 없었던 것은 물론이구요, 번호 호명하면 점수 매기는 방식으로 채점을 했는데,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지만, 미켈란젤리의 번호가 7번이었다고 하죠.

 


아무튼 심사위원이었던 코르토의 "리스트가 다시 태어난 것 같다“는 평과 함께 미켈란젤리는 고독한 피아니스트의 대장정을 시작했어요.

 


미켈란젤리의 사진을 보면 한 장도 미소를 지은 사진이 없어요. 굉장히 차가운 인상과 함께, 완벽주의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는데요, 어릴적에는 소심하기 이를 데가 없었구, 어른이 되어서는 콤플렉스에 시달렸다고해요. 콤플렉스이긴 한데, 열등감이 아닌 우월감의 콤플렉스.

6살 때 첫 연주회를 하는데, 짧은 스커트를 입고 무대에 나가서는 한참을 서 있다가 다시 들어와서, 무대 뒤에서 다시 내보내니까, 또 가만히 서 있다가 도로 무대 뒤로 들어와서, 다시 내보냈는데 또 무대 위에서 가만히 서 있더래요. 그래서 “아참”, 하고서는 누군가가 미켈란젤리를 피아노 의자 위에 앉혀줬더니 그제사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대죠. 소심의 극치.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는 열광적인 박수 갈채를 보내는 청중들에게 미소 한 번 보내주지 않고 정중하게 인사로 답하곤 했는데, 나중에 누군가 그 이유를 물었나봐요. 왜 그렇게 표정이 딱딱하냐...

그랬더니, “찬사는 나에게가 아니라 작곡자, 베토벤, 쇼팽, 드뷔시에게 보내어져야 한다. 피아니스트에게 보내는 찬사는 정말 혐오스럽다”라고 말했답니다.

 


음악 듣겠습니다.

1939년 밀라노에서 연주한 그라나도스의 스페인 무곡 op.37 중 제5곡 <안달루시아>입니다. (연주시간 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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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시간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