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S 방송원고:당신의밤과음악 05-12-31 글렌굴드3
2007-11-27 18:50:01
허원숙 조회수 3320

KBS FM 당신의 밤과 음악

허원숙의 <생활을 노래함>코너

2005년 12월 31일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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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연주회의 청중은 나의 연주회를 흠집내기 위한 군중” 라고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가지고 있던 굴드는 1964년 본인이 약속한대로(일방적 통보이긴 했지만) 결국 무대에서 전격 은퇴를 합니다.

은퇴하고 나서의 글렌 굴드의 삶은 이전에 있었던 연주회처럼 세간에 많은 화제를 뿌렸죠.

우선, 음반녹음 작업은 이전보다 훨씬 활발하게 진행되었구요, 굴드 생각에는 미래에는 연주를 듣기 위해 사람들이 모이는, 이른바 음악회라는 형식이 없어지고 음반이 활성화될 거라는 예상을 하고 음반 작업에 더욱 몰두하게 된 거죠.

굴드는 녹음실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녹음에 전념하였는데, 단지 자신의 피아노 앨범만을 위하여 녹음실에 있었던 것은 아니고, 방송 제작 일을 하기 시작했어요.

캐나다 국영방송에서 라디오와 텔레비전 프로그램 일을 하게 되었는데 예술에 관계된 프로그램으로는 은퇴 전에 이미 <쇤베르크, 음악을 바꾼 사람>이라는 다큐 프로를 만들었구요, <파블로 카잘스, 라디오를 위한 초상>과 같은 음악 프로그램도 있었죠.

그런데 굴드가 만든 프로그램에는 음악이랑 상관없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도 있었어요. 1967년에 캐나다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캐나다 국영방송에서 굴드가 특별 다큐를 제작했는데, <북쪽 생각  The Idea of North>라는 프로였어요. 캐나다의 북쪽 영토에 대하여 간호사, 지리 인류학자, 작가 두 사람의 인터뷰 내용이 포함되어있는 것인데, 재미있는 것은 그 사람들의 인터뷰를 따서는 그것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방송시간이 너무 길어지니까 그것을 한꺼번에 겹쳐서 마치 푸가처럼 동시에 4명의 이야기를 틀어주는 거였어요.

어떻게 그 사람들이 말하는 내용을 알아들으란 말이냐고 하니까, 어차피 오페라에서도 각기 다른 내용으로 4중창을 부르지 않냐 면서 4중창의 내용이나 멜로디를 못 알아들을까 두려워 4중창을 작곡하지 않는 작곡가는 없다면서 자신의 작품도 마치 오페라처럼 이해하면 된다고 했구요, 본인은 이 자체를 자신의 작곡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그 외에도 캐나다에서 만든 영화의 음악을 담당해서, 자신의 연주가 들어간 영화 배경음악도 많이 만들고요, 인물을 풍자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기도 하고요.

그런데 음반으로 세계를 점령하다시피 한 글렌 굴드도 작곡에의 미련이 많이 있었는데요. 연주로 얻은 명성은 오래가지 못하고 작품만이 시대를 초월해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때문이었죠. 이제는 연주도 음반, 영상 등으로 시대를 초월한 예술품이 되었는데 말이죠. 그래서 현악4중주를 작품번호 1번으로 작곡했는데 그 이후의 작품번호2번은 나오지 않았다고 해요.

오늘 감상하실 곡은요, 굴드의 작곡가로서의 능력을 확인할 수 있는 곡인데요, 바로 자신이 작곡한 카덴자로 연주하는 베토벤의 협주곡 1번 op.15의 1악장입니다. 콜럼비아 심포니 오케스트라, 지휘에는 블라디미르 골쉬만입니다. (연주시간: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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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덴자 어떠셨어요? 대위법이 현란하게 정말 대단하죠?

작곡에서 뿐 아니라 글렌 굴드는 자신의 글에서도 현란한 문체를 사용했어요. 부르노 몽생종이 제작한 리히터의 DVD에서 보면, 글렌 굴드가 리히터에 대해서 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냥 대화체의 말이 아니라 수식어가 잔뜩 붙은 복잡한 문장으로 말을 하는 걸 볼 수 있죠.

글렌 굴드는 자신이 말하는 내용도 심오할 뿐 아니라, 애매모호한 문체를 사용해서 남이 잘 알아듣지 못하는 글들을 많이 남겼는데, 단순하게 말해도 될 것을 여러 번 꼬아서 설명을 하기도 하고, 또 자기(GG)가 자기(gg)를 인터뷰하는 글도 실었구요.

또 재미있는 것은, 제가 가지고 있는 LP 음반인데요, 리스트가 피아노 독주로 편곡한 베토벤의 교향곡 5번 음반이에요. 그 음반 재킷 안에는, 자신의 연주에 대한 리포터의 글과 음악학자의 글, 의학박사의 심리분석의 글, 또 부다페스트의 음악노동자총연합노조신문의 기사를 인용한 글 등 4명의 글이 실려 있는데요, 이게 다 글렌 굴드가 만들어낸 가상인물들의 글이죠.

 


험프리 프라이스-데이비스: “이달 발매된 음반 가운데 미국 거대기업인 CBS가 최초로 피아노로 연주한 것이라고 떠벌인 것도 있다. 프란츠 리스트가 편곡한 베토벤 교향곡5번을 엉뚱하기 짝이 없는 괴짜 캐나다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가 연주한 음반은.... ”

 


교수 칼 하인즈 하인켈 박사:“이 작품의 첫 악장 197번째 마디와 201번째 마디의 중간 C 음이 빠져있다는 사실을 환기하며... 만약 이 음을 빠뜨린 게 헝가리 편곡자 (말하자면 리스트)라면, 우리는 왜 그랬는지 알아봐야 한다. 이 편곡자는 그렇게 하는 것이 베토벤을 도와주는 거라고 생각한 걸까? 감히 우리에게 우리 음악을 가르쳐 주겠다고? 아니면 베토벤의 음표에 관해 자기만 알고 있는 지식이라도 있는지? 라고 묻는다”

 


의학박사 플레밍:“녹음이 진행됨에 따라... 직업에 혼란스러워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났다. 이 예술가가 고른 작품은 사실상 교향악단을 위한 것이었다. 이 예술가가 이 작품을 선택했다는 것은 지휘자라는 권위있는 역을 맡고 싶어하는 욕망을 보여주고 있다......”

 


졸탄 모스타니(부다페스트의 음악노동자 총연합 노조신문): “사랑하는 프란츠(리스트),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것이, 당신의 작품이, 당신이 모험으로 시도한 작업이 왜곡되어서, 몇몇은 살찌우고 많은 사람들을 더 가난하게 만드는 구실만 했다는 것을 당신이 알게 된다면. 당신은 사람들을 위해 연주를 했어요, 착한 프란츠.... 영광을 구하지도 않았고, 이윤을 추구하지도 않았죠. 그러나 친애하는 프란츠, 여든 명이나 일하기를 거부했답니다. 이들 여든 사람의 아이들은 오늘 밤 더욱 춥게 지낼 겁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소심하고 줏대없는 피아니스트 (굴드) 한 명이 달러의 노예가 되어 그의 영혼을 팔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탐욕에 가득 차 당신의 작품을 마구 착취했습니다.”

 


대단하죠?

자신의 음반에 이렇게 가상인물들의 글을 실었던 굴드는 피아노 외에도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이 작가였대요. 그래서 자기가 만든 프로그램의 대본도 자신이 쓰고 심지어는 분장을 하고 연기까지 했죠.

 


음악 들을까요?

J.S. 바흐의 <푸가의 기술> 중에서 Contrapunctus I과 II입니다. 글렌 굴드의 오르간 연주로 감상하시겠습니다. (연주시간 2:45 + 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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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글렌 굴드를 떠나 보내야 하는 시간이 되었네요.

부친이 모피상을 하던 관계로, 어릴 적부터 동물이 죽어서 껍질만 남겨져 있던 모습을 보고 자란 글렌 굴드는 아버지가 지은 죄를 속죄하기라도 하듯, 평생 동물을 사랑했다고 하죠. 음식도 생선만 먹다가 말년에는 오믈렛 같은 것으로만 그것도 하루 한끼만 식사를 했고요. 그의 평생 관심사 중 하나가 늙은 소와 말, 개 그리고 다른 동물들이 죽기 전에 쉴 수 있는 농장을 마련하는 것이었다고 해요. 실제로 글렌 굴드는 유언장에서 자신의 재산 중에 5만 달러만 아버지를 위해 남기고, 전재산 75만달러를 구세군과 동물 복지 기구인 토론토 동물애호협회에 헌납했다고 해요.

평생 청교도적인 삶을 살았다는 글렌 굴드의 사인은 약물 과다복용에 따른 뇌손상이었다고 해요.

장례식에서 “평생 천재라는 짐을 지고 살았던 사람... 그는 독특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모든 것이 남달랐습니다.... 진실로 현대적인 인간이자 뛰어난 개혁자였습니다.....인간의 조건에 큰 관심을 가졌으며,  내가 만나본 사람 가운데 가장 순수하고 도덕적인 인간이었습니다.”라는 추모사와 함께 영결예배가 끝나갈 무렵 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녹음한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아리아가 스피커를 통해서 조용히 울려 퍼졌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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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감상 : 멘트 없이  new 골드베르크 변주곡 아리아 (연주시간 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