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S 방송원고:당신의밤과음악 05-12-10 리히터2
2007-11-27 18:47:50
허원숙 조회수 2634

KBS FM 당신의 밤과 음악

허원숙의 <생활을 노래함>코너

2005년 12월 10일 원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허)지난 두어 주일 동안 정말 바빴어요.

브뤼노 몽생종이라는 사람이 만든 리히터의 DVD 보고, 책으로 나온 회고담 읽고, 거기 언급되어 있는 음반 듣고 하다보니까,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네요.

 


(이) 브루노 몽생종이라하면, 글렌 굴드 DVD 만든 사람 아닌가요?

 


(허) 맞아요, 몽생종은 프랑스의 바이올리니스트이면서 영화제작자인데, 글렌 굴드, 리히터 외에도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 같은 거장들의 영상기록물을 만든 사람이죠.

이 회고록도 1995년부터 2년 동안 거의 매일 리히터와 만나서 이야기하면서 내용을 정리해 만든 거라고 해요.

 


리히터는 1930년대부터 95년 마지막 연주회까지 전 세계를 돌면서 3589회의 연주회를 했는데, 연주무대에서 은퇴한 이유가 뭔지 아세요?

 


(이)아르투르 루빈쉬타인은 눈이 안 보여서 더 이상 연주할 수 없어서 그만 뒀다고 하잖아요.

 


(허) 맞아요. 참 애석하게도... 그런데 리히터의 경우는 귀 때문이었어요.

1970년대 중반쯤 되어서 리히터는 귀에 이상이 생겼는데, 절대음감이었던 귀가 고장난 거였어요. 예를 들면 A 단조로 연주를 하는데, 귀에 들리는 음악은 B 단조, 뭐 그런 거죠. 그러니 그 혼돈을 바로잡으려고 G 단조로 조옮김을 하면서 연주해야 하는 불편한 일이 일어나게 되는 거죠.

연주한 음들이 실제 자신의 귀에서는 다른 음으로 들리니까 연주하는 시간 내내 끊임없는 조옮김을 해대면서 연주해야 하는 리히터가 생각해 낸 해결책은, 악보를 보면서 연주하는 거였어요. 악보를 보면서 연주하면 혹시 손이 다른 조성으로 가더라도 미리 막을 수 있을 테니까요.

프로코피에프 소나타 7번 같은 곡도 나흘이면 외워서 연주할 수 있었던 사람, 서로 다른 80회분의 독주회 프로그램이 항상 머릿속에 있었던 사람.

그런 사람이 악보를 놓고 연주할 수밖에 없게 된 사연은 바로 음감이 변한 귀 때문이었는데, 1995년이 되자 더 이상은 악보를 놓고도 조성을 바꾸면서 연주하는 게 너무 힘든 상황이 되었다고 해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은퇴했다고 하는데, 그 때 나이가 80세.

대단하죠.

 


연주 듣겠습니다.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의 슈베르트 소나타 Bb 장조 D.960 중에서 2악장입니다.

(연주시간:약 10분)

****

 


멋있죠....

1957년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리히터의 이 곡을 듣고 글렌 굴드가 한 말이 있어요. 매우 분석적인 치밀한 계산과 즉흥성에 가까운 자연스러움의 결합이라구....

그리고, 리히터의 연주는 “연주의 메커니즘과 관련된 일체의 문제를 뛰어넘어 자신들이 음악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는 인상을 주려고 노력함으로써 청중이 연주가 아니라 음악 그 자체와 교감하도록 도와주며, 리히터는 자신의 강력한 개성을 매개로 청중과 작곡자를 연결시킨다. 그리하여 청중은 대개의 경우 이미 익숙해져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새롭게 작품을 발견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고 말했죠.

 


리히터는 연습을 무지 많이 하는 피아니스트로 알려져 있죠.

그런데 본인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부인하죠. 자기는 하루 3시간 연습 이상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고 하죠.

그런데 그 계산방법이 묘해요.

하루 3시간 X 1년 365일= 1095시간 (일년에 필요로 하는 연습시간)

그런데, 1년 중 연주여행으로 빠지는 날이 얼마나 많겠어요. 50년 동안 3589번 연주했으니까 어림잡아 1년에 70일은 연주날.

그리고 비행기 안 타고 자동차로 연주여행 다니니까 시간 많이 걸리죠. 게다가 병에 걸리거나 몸이 불편한 날도 있으니 그런 날도 연습 못하죠. 그러니 그런 날들 다 빼고 나면 얼마 안 남는데, 1095시간을 그 날수로 나누면... 하루에 10시간 넘게 연습해야 되는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득부득 3시간 이상은 안 쳤다고 시치미를 뚝 떼는 얼굴표정이 정말 귀여웠어요.

 


연주회 끝나고 청중들이 다 돌아가고 나면 연주회장에 가까운 사람들 몇 명만 남아서 또 다른 프로그램으로 연주회를 계속하기도 했구요, 연주회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서 그 밤에 3시간 넘게 또 연습을 할 때도 많았구요.

어떤 일기에 보면, 자기가 녹음한 CD 를 듣고 “나는 학생처럼 연주하고 있다. 정성스럽게, 기교를 부리지 않고..... 그래, 나는 학생이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학생은 언젠가는 연주를 잘하게 될 것이다.”라고 적혀 있는 일기도 있어요. 그런데 그 일기를 쓴 게 1992년. 학생의 마음, 초심을 항상 간직하고 있는 77세의 노장.... 진짜 존경스러워요.

 


그리고, 어느 날의 일기에서는, 기돈 크레머와 아르헤리치의 연주를 듣고,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 연주회였다. 하긴 놀랄 일도 아니다. 이들은 리허설도 하지 않고 바로 무대에서 연주를 한다니 말이다.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좋은 연주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저 수치스러울 따름이다. (특히 바이올린). 이런 태도로 예술에 임하는 것을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고 분개하기도 했구요.

오텔로 공연을 하는 키리 테 카나와를 보고서는, “키리 테 카나와는 아름답다. 하지만 그녀는 데스데모나가 아니라 오히려 카트린 드뇌브에 가깝다.”라고 하기도 하구요.

폴리니나 아쉬케나지에 대한 일반적인 찬사가 아닌 신랄한 비평들도 들어있구요.

(폴리니: 대단한 근육질의 쇼팽, 시정이나 섬세함도 없고 즉흥성도 없고, 영웅주의는 넘치도록 많음, 폴리니가 바르샤바의 콩쿠르에 입상하던 시절에 유행하던 폴란드적 경향. 당시에는 쇼팽을 애국자나 혁명가로 보이게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고약하다 등등)

(아쉬케나지:완전히 실망했다. 표현이 제로다. 아무런 감흥이없다. 그런데 이게 아쉬케나지란다. 그는 다른 행성에서 온 게 아닐까?)

 


음악 듣죠.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C 장조 K. 545의 1,3악장인데요.(연주시간 합 7분)

그리그가 모차르트 소나타에 second piano를 추가해서 만든 곡이에요.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와 엘리자베트 레온스카야입니다.

 


*****

 


(이) 정말 황홀한 연주네요. 그런데 누가 퍼스트, 누가 세컨드 피아노인지?

 


(허) 리히터가 너무 좋아하는 작곡가가 그리그잖아요, 그리고 음색이나 표현 하는 걸로 봐서 아마도 그리그가 작곡한 second piano 를 리히터가 치고, 레온스카야는 오리지날 모차르트의 곡을 친 것 같아요.

 


리히터의 음악일기를 보면, 1970년부터 1995년까지 끊임없이 음악에 관한 내용들을 기록해 놓고 있어요. 집에서 혼자 또는 여럿이서 음악 감상을 했던 내용에서부터, 음악 역사에 남을 만한 중요한 순간까지.

80노인이 될 때까지 일기를 꼬박꼬박 썼다는 것도 대단하지만, 그보다 더 한 것은, 그 책  뒷부분에 있는 3589회의 독주회 일지. 어디서 무슨 곡을 연주했다는 기록이요.

그리고 연주곡 목록....

36페이지에 달하는 목록을 보고 있으면, 이게 한 사람이 연주한 프로그램이란 느낌이 들지 않고 그냥 피아노 문헌을 다 적어놓은 것 같은 생각이 들죠. 그리고 차라리 안 친 곡을 적어놓으시는 게 빠르겠다 생각도 들고요.

 


아무튼, 책이랑 DVD랑, CD랑... 리히터와 함께 보낸 지난 두 주간. 순수하고 성실하고 강직한 예술가를 만나고 정말 머리가 맑아지고 피가 깨끗해지는 느낌이었어요.

물론 그 책에는 그런 내용 뿐 아니라, 독일인이었던 아버지가 러시아에서 독일 사람이었다는 이유로 총살된 사건, 그리고 아버지를 총살당하게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결국은 자기 어머니와 결혼한 이야기. 그런데 리히터가 유명해지니까, 자기 이름을 리히터라고 바꾸고서는 자기가 리히터의 아버지라고 우기고 다닌 기가 막힌 이야기.

그리고 자기를 미행하던 러시아 정보부의 요원의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정말 많은 이야기가 들어있어요. 꼭 읽으세요. 강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