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S 방송원고:당신의밤과음악 05-11-26 막스 레거와 폭식증
2007-11-27 18:47:00
허원숙 조회수 2896

KBS FM 당신의 밤과 음악

허원숙의 <생활을 노래함>코너

2005년 11월 26일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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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예술가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세요?

창백한 얼굴에 비쩍 마른 몸매.

눈가에 도수 높은 안경과, 신경질적인 외모.

뭐 그런 것들이 떠오르지 않으세요?

오늘 말씀드릴 작곡가는 그런 가냘픈 이미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인데요,

얼핏 보기에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뚱뚱한 체구를 가진 독일의 작곡가 막스 레거입니다.

 

레거의 음식에 대한 욕구는 배가 고파서라든지, 목이 말라서 그것을 충족시키려고 먹고 마시는 정도가 아니구요, 정말 심할 정도로 마구 마구 먹고 마셨는데요, 음주가 지나치다는 의사의 충고를 받고 굳은 결심으로 술을 끊었던 레거가, 연주회를 마치고 술 대신 레몬수 10리터랑, 코코아 10리터를 한꺼번에 마셨다고 하죠. 담배는 강한 브라질산 시거를 하루에 20개비씩 줄담배로 피웠구요.

언젠가 한 식당에 가서는 두 시간가량 계속 먹을 수 있는 양의 스테이크를 주문했다고 하고요.

어느 집에 초대받았을 때에는 농담 섞인 말로 욕조에 가득 찰 만큼의 커피를 달라고 했고, 소시지를 수십개나 먹었다고 해요.

먹고 마시고 담배 피우는 양이 어마어마해서 놀라셨겠지만, 레거의 작품을 접해 보면 얽히고 얽힌 복잡한 화성과 구성을 가진 곡을 어떻게 썼을까 의문이 나다가도, 아, 이렇게 폭음과 폭식을 일삼는 사람이면 음악에 대한 열정도 음식의 양처럼 엄청나서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도 남보다 몇 배나 강할 테니, 이런 곡을 쓸 수 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죠.

 

레거의 폭음과 폭식은 일간신문과 대중들 사이에 화제의 대상이 되었는데, 만화가들은 한 손으로는 작품을 쓰면서 또 다른 한 손으로는 소시지를 먹는 동물 모습의 캐리커처를 그리기도 했대요.

그런데, 이렇게 과음, 과식, 또 많은 양의 흡연은 ‘호르몬 실조증’에 원인이 있다고 해요. 그러니까 본인의 의지로 다이어트를 해서 정상인으로 돌아올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 내분비계 특히 뇌하수체의 이상으로 그런 증상이 나타났다는 거죠.

그런 폭식하는 현상은 비단 음식에만 국한된 건 아니었어요.

군 복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아들에게 아버지는 그랜드 피아노를 사줬는데, 이 피아노가 생기니까 마음 속에서부터 창작의욕이 미친듯이 용솟음쳐서는, 그 전까지는 불과 20여곡 정도를 작곡했었는데, 아버지가 피아노를 사 준 이후 3년간 40곡에 달하는 작품을 썼다고 하죠.

 

오늘 레거의 작품 중에서 먼저 감상하실 곡은 피아노 작품에서 골라보았는데요,

"Ewig dein!" 우리 말로 번역하면, <영원히 당신 것>이라는 제목의 살롱소품입니다.

이 곡에서 재미있는 점은, 작품 번호가 op.17523 이라는 것과,

템포 표시에 “가능한 한 가장 빠른 템포보다 조금 더 빨리”라고 되어있는 것,

그리고 이 곡은 a la Krebs 로 연주할 수 있다는 것이죠.

a la Krebs 는 게가 기어가듯이 연주하라는 말인데, 악보를 왼쪽에서부터 읽어나가는 게 아니라 오른쪽에서부터 왼쪽으로 거꾸로 읽어나가는 걸 말해요. 그러면 다른 음악이 나타나는데 더 아름답다고 작곡자가 써 놓았고,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거꾸로 된 악보도 내 저작권이 있다는 토를 달아놓았어요.

작품번호가 17523으로 써 있어서 과연 이런 작품 번호가 가능한가 하고 책을 다 찾아보았는데 레거의 작품 목록에는 작품번호 147 정도로 끝나는 걸 보니, 아마도 장난으로 이런 작품 번호를 매겨 놓았나봐요.

“나는 이렇게 음식도 많이 먹는 사람이니 나의 작품번호도 아마 이 번호까지는 쓰지 않을까..... ”  뭐 그런 생각으로요.

번호는 길지만, 곡은 짧습니다. 1분 47초 되겠습니다. 연주에는 1987년 브람스 콩쿨 1등 수상한 하노버 음대 교수인 Markus Becker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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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감상하실 곡은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일명 <터키 행진곡>의 1악장 주제를 가지고 만든 레거의 <모차르트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푸가, 작품 132>인데요,

레거가 마이닝겐 궁정 관현악단의 지휘자로 있으면서 연주와 창작활동에 무리를 한 끝에 졸도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잠시 정양을 하고 있는 그 틈에 또 작품을 썼는데 그 작품이 바로 이 변주곡입니다.

전 곡의 길이는 35분이 넘는데, 오늘은 그 중 제7, 제8 변주곡을 듣겠습니다. (연주시간 약 11분)

모차르트의 주제도 정말 꿈결같이 아름답지만, 레거의 변주곡은 현학적이면서도 온화한 대위법과 다양한 화성으로 모차르트의 원곡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연주에는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이구요, 지휘에는 콜린 데이비스 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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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평생을 폭식과 폭음, 과다한 흡연과 또 그에 걸맞게 두꺼운 화성과 구조의 곡을 작곡한 레거의 최후는 어떠했는지 궁금하시죠?

레거가 자신의 작품 중 최고의 작품이라고 자처했던 작품, 바로 방금 들려드린 <모차르트 변주곡>의 초연을 1915년에 했는데, 그 이후에 또 다시 엄청난 프로그램을 짜기 시작했대요. 당연히 자신을 과로로 몰아가게 되었던 거죠.

해가 바뀌어 1916년이 되었는데, 무력증에 빠진 레거는 그렇게 많은 작품을 쓰고 연주하면서도 일에 진전이 없다고 한탄하였고, 평상시처럼 강의하고 친구들과 저녁식사하고, 호텔방에 들어가서는 갑자기 복통, 호흡곤란, 발한, 흉통 등의 증상이 나타나 다음 날 아침에는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니었대요. 43세의 한창 나이에.

에구 에구.... 너무 열심히 살았어요. 너무 많이 드셨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