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S 동병상련
2007-11-27 18:43:37
허원숙 조회수 2657

"....이래서 세계적인 남자피아니스트는 있어도, 세계적인 여류피아니스트는 없나봐요..."
의사선생님이 맥없이 축 늘어진 내 손가락 마디를 만져보면서 툭! 말을 던졌다.
"...피아노란 악기가 사실 여자가 하기엔 너무 크고 무겁잖아요."
의사 선생님은 자기가 한 말이 행여 내게 상처가 될까봐 조심스럽게 부연설명을 달았다.
사실, 나도 그 점엔 십분 동감하면서도, 그 말을 듣는 순간 뚜껑이 확 열려가지고 한 마디 했다.
"흥!(물론 요 단어는 내 입 속에서만이지), 세계적인 여류피아니스트가 없다고요?
마르타 아르헤리치라고 못 들어보셨나보죠?"


지난 해 겨울, 독주회를 마치고서부터 아프기 시작한 손가락.
이대앞의 정형외과에 가서 사진찍고 물리치료 받아보고,
뉴욕의 용하다는 중국 침술사로부터 전기침도 맞아보고,
서대문의 또 용하다는 침 놓는 의사한테 몇 달 동안 가보고,
파라핀 요법이 좋다고 해서, 뜨겁게 녹인 촛물에 손도 담가보고...
내 나름대로 백방으로 애써보았지만, 그 때 뿐.


6개월 정도를 이 곳 저 곳 다니다가,
지난 여름에는 드디어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용하다는 류마티스내과를 찾았다.
내 손 보시더니 대뜸 의사 선생님 하시는 말씀.
"이거 침 맞고 난리쳐도 안 낫습니다. 원인이 순환기에 있는 거거든요."
나는 다시 의사 선생님의 착한 양이 되어, 선생님의 처방대로 열심히 약을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류마티스 약이라는 게, 위에는 제까닥 기별이 가는데, 손에는 별로 실력발휘를 못하는 것 같았다.


"선생님, 소화는 잘 안 되는데, 손은 도통 기별이 없네요."
의사 선생님은 새로운 약을 처방해주시고, 또 당부도 잊지 않으신다.
"저기, 당분간 피아노 연습 하지 마세요."
"예......."


어느 덧 계절은 여름에서 가을로 바뀌어, 사과도 못 쥐던 내 엄지손가락은 이젠 컵을 잡아도 그런대로 쓸 만하게 되었고, 약하던 네째 손가락도 조심스럽게 조금씩 살살 피아노를 만질 수 있게 되었다.
"어, 나 이거 나으려나봐..."
그러던 중에 머레이 페라이어의 연주회 취소 소식을 듣게 되었다.
연습으로 인한 손가락 부상으로 염증이 생겼다는 것, 앞으로 몇 달간은 피아노를 치지 말라는 의사선생님의 충고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올 가을~겨울 연주여행을 모조리 취소했다는 것.
어쩜 내 경우와 그리도 닮았는지....
"페라이어 아저씨! 너무 열심히 살지 말고 나처럼 탱탱 놀아봐요. 그럼 좋아질텐데..."


오랜만에 음반가게에 들렀다.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차이코프스키 협주곡 1번과 라흐마니노프 3번이 들어있는 CD를 두 장 샀다.
한 장은 내가 듣고, 또 한 장은 아르헤리치를 아직도 모르시는 우리 의사선생님께 선물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