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S 비행기에서 있었던 일...
2007-11-27 18:37:10
허원숙 조회수 2267

얼마 전 개인적인 일로 외국에 다녀왔습니다.
시차를 극복해보려고 비행기를 타자마자 수면제 비슷한 걸 먹고 억지로 잠을 청했습니다.
처음에는 잠이 오는 것처럼 머리가 비잉 돌더니 그 다음부터는 아예 정신이 말짱해져서 도무지 잠이 오지 않더군요.
"도대체 이 놈의 약은 잠도 안 오냐..."
신경질도 났지만, 도착하자 마자 한국에서 할 일들을 생각하면 성질내는 것보다는 잠을 억지로라도 자 놓아야겠다는 생각에 계속 눈꺼풀을 닫은 채 어떻게든 자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식사를 주려는 승무원들의 바쁜 걸음에 비행기 전체가 소란스러워지더니 이제 식사가 다 끝났는지 주변이 조용해진 것 같았습니다.
눈을 떠보니, 비행기 창은 내려져있고 어두운 가운데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습니다.


실미도...
한 달포 전에 극장에서 그 영화를 본 나는 그 영화에 욕설이 너무 많이 나오는데 온가족이 비행기안에서 보기에는 적당치 않은 영화가 아닐텐데.....하는 생각에 헤드폰을 집어들었습니다.
헤드폰을 끼고 들으니 다행히도 욕설이 나오는 부분은 삐~ 하는 기계음으로 지워져있더군요. 심한 장면도 커트되었고...
잠도 안 오는데 영화 복습이나 하지뭐... 하고 생각하고 영화를 계속 보고 있는데, 내 옆자리에 앉으신 한국인 노부부도 열심히 그 영화를 보고 계시더군요.
"저분들은 비행기에서 피곤하실텐데 참 열심히 보고 계시는군" 하면서 그분들을 물끄러미 보고 있노라니까, 아니, 헤드폰을 쓰지 않고 그림만 보고 계시는 거더라구요.
이제 설경구랑 그 일당이 실미도에서 탈출해서 버스타고 유한양행 앞으로 돌진하는 장면이었는데요....
나는 "아저씨!" 하고 그 할아버지를 불렀습니다.
물론 외모상으로는 물어보나마나 할아버지였지만, 나의 외교성 단어, 아/저/씨/ 를 사용하였지요.
"아저씨! 영화 보시는 거예요?"
그랬더니 그 할아버지와 옆에계신 할머니, 미소를 지으면서 그떡 그떡, 비행기에 타니 웬 재미난 영화를 다 보게 되는구먼 하는 표정으로 나에게 대답을 하시더군요.
다시 물었죠.
그런데 저기, 헤드폰 안 받으셨어요?"
그랬더니, 앞 좌석 주머니에 쑤셔박아놓은 헤드폰을 비닐봉지째 나에게 보여주시더라구요.
"저, 그거 줘보세요."
나는, 비닐봉지에서 헤드폰을 꺼내어, 귀에 대는 부분에 끼우는 스폰지마개를 끼워서 할아버지 귀에 걸어드리고, 채널 1번을 틀어드렸지요.
헤드폰을 쓰자마자 그 할아버지의 얼굴이,
"아니, 세상에! 무성영화가 아니고 이렇게 소리가 나는 영화였남! 어~ 이제보니 남들은 다 소리나게 해서 들었구만" 하는 표정이시더라구요.
그러더니 나에게 하시는 말씀.


'땡큐!"


아으, 난 뭐라고 해야되나...유아 웰컴이라 해야 되나....
할아버지의 유창한 영어발음에 기죽어서 난 살포시 다시 친절한 미소로 대답했습니다.


성공적으로 유성영화 관람에 도전하신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신 할머니.
이제는 당신 것도 해 달라고 나에게 헤드폰을 내미시더군요.
친절한 나는 으하하, 비닐봉지 뜯어서 스폰지 마개 끼워서 할머니께 드렸죠.
내 자리와 좀 거리가 있는 관계로,
"아주머니, (이것도 외교성 발언) 의자 손잡이 옆에 보시면 아저씨처럼 구멍이 있을 거예요. 거기에 끼우세요" 남이 보면 진짜 "너 원래 그렇게 곰살맞냐" 할 정도로 내가 보기에도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씀을 드렸죠.
그런데 헤드폰 끼우는 구멍을 가까스로 찾으신 할머니 하시는 말씀.
"근데 내 꺼는 왜 음악만 나와!"
"아, 아주머니 그거 저 채널을 1번으로 하셔야죠."
나는 한 번 상냥하면 영원히 상냥하라는 신조 아래, 계속 미소지으면서 할머니께 채널 버튼을 가리켰습니다.


"내껀 고장났나벼. 계속 음악만 나오네..."
할머니의 투정이 이젠 하늘을 찌릅니다.
어디, 왜 그러지? 내 것도 그런가? 하면서 나는 그동안 내 귀에서 빼놓았던 헤드폰을 다시 귀에 꽂고 영화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있는대로 성질이 치밀어서 할머니에게 말했습니다.
"아으, 할머니! 지금은 영화에 음악만 나오는 장면이잖아요!"
어느 덧 실미도는 막을 내리고, 나의 수면제의 약발은 더이상 효력을 발휘하지 않았습니다.


2004.3.31.